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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기억할 오늘] 메이 웨스트(Mae West)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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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리비도의 여신' 메이 웨스트가 1893년 8월 17일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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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겸 작가 메이 웨스트(Mae West)가 없었다면 1920~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은 훨씬 을씨년스러웠을 것이다. 또 그가 없었다면 자유와 여성 인권은 실제보다 더디게 확장됐을 것이다. 그는 보드빌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을 누비며 ‘리비도의 여신’이라 불렸고, 실제 삶에서도 청교도적 금욕주의와 위선을 조롱하며 자유롭고 당당하게 개인의 삶을 즐겼다. 그가 남긴 말들은 지금 들어도 뭉클하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갈 수 있다.(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지만, 제대로만 살면 한 번으로 족하다. (You only live once, but if you do it right, once is enough.)

“사랑은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지. 가난과 치통만 빼곤. (Love conquers all the things except poverty and toothache.)”

“내 몸매가 썩 멋지진 않지만 난 그걸 드러낼 줄 알았다. (I didn’t discover curves; I only uncovered them.)”

그렇게 드러낸 그의 몸매에 인류가 감응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입술 선을 모방해 ‘메이 웨스트 소파’란 걸 만들었고, 그의 가슴처럼 부푼 해상 구명조끼를 군인들은 ‘메이 웨스트’라 불렀다. 여성들은 그를 통해 자신의 몸과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곤 했을 것이다.

그는 권투선수 출신 아버지와 속옷모델 어머니의 딸로 1893년 8월 17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5세 무렵부터 교회 공연을 시작해 7세 때부터 아마추어 무대에 섰고, 14세에 보드빌 배우로 데뷔했다. 18세 무렵엔 춤과 연기로 유명해져 ‘꼬마 요부(baby vamp)’로 불렸고, 40세 되던 33년 헐리우드로 진출해 일약 월드스타가 됐다. 그는 ‘Sextette(1978)’ 까지 12편의 영화를 찍었고, 30대엔 직접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다. ‘Sex(1926)’ 등 작품 때문에 외설죄로 구류를 사는 등 오래도록 검열에 시달렸다.

웨스트는 “결혼으로 남자가 바뀌리라 기대하지 마라. 교화는 학교에서나 하는 일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는 18세에 잠시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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