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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공포의 6국, 그 잔해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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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현장】 남산 중정 지하 취조실 해체

중앙정보부~안기부까지 시국사건 제조실

냉장고 문 달린 밀실서 물고문·전기고문

“국가폭력 상징, 없애지 말고 그대로 두자”



한겨레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벽을 16일 오후 공사 관계자들이 해체해 크레인으로 들어 옮기고 있다. 서울시는 이 공간을 ‘중앙정보부 6국’을 의미하는 ‘6’과 고문과 용공조작 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6’으로 이름짓고 내년 8월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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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죽음의 방이라고 불리었던 남산 중앙정보부 6국 지하실 문이 열렸다. 서울시가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을 국가폭력 역사를 기록하는 광장과 전시실로 만들기로 하면서 지하실도 원래의 모습을 남길 수 있도록 해체, 재설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날 고문과 폭력의 현장이었던 지하 취조실을 해체하는 과정이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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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6국 자리에 선 최민화씨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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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고 책상 2개만 있었어. 그 사이에 철봉을 끼워서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얼굴에 물을 부었지.”

옛중앙정보부6국 해체 현장을 지켜보던 최민화(68)씨의 시간은 43년 전으로 돌아갔다. 1974년 3월28일 밤, 연세대 신학과 대학생이던 그는 눈이 가려진 채 6국으로 실려왔다. 민청학련 사건 피의자로 지목된 그가 쉽사리 배후를 대지 않자 4일째 되던 날 지하실로 끌려내려왔다. 그는 아직도 30㎡ 넓이의 지하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도가 있었던 넓은 방은 주로 물고문이나 통닭구이고문에 쓰였다. 통닭구이는 손과 발을 묶고 때리는 고문이었다. 또 지하실 한 켠엔 밀폐된 작은 방이 있고 여기 의자가 두개 있었는데 의자 하나는 피의자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꿈쩍하지 않도록 바닥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30여차례나 6국에 불려다닌 최민화씨는 80년대엔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끌려가봤다. 최씨는 “남영동은 처음부터 고문수사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엉성하게 만들어진 폭력의 장소였다”고 회상했다.

2004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에서 6국 출신 수사관은 “지하는 보일러와 기계실로 가득찬 곳이어서 고문이 이뤄질 여지가 없었다”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끌려 왔던 사람들은 이곳을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때 지하실은 두개의 밀실을 갖춘 고문실로 사용됐다. 밀실마다 정육점 대형 냉장고에서 쓰는 것 같이 생긴, 안에선 열리지 않는 두꺼운 철문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각각 10㎡, 12㎡ 남짓한 두 개의 작은 방에서 인혁당 사건 피의자 허작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안경알을 깨서 자살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탈장과 폐농양을 일으킬 때까지 짓이겨졌다.

서울시는 16일 두 밀실의 벽을 해체해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내년 8월까지 고문·취조실의 기억을 간직한 전시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전시관 ‘기억6’ 기획자 서해성씨는 “이 공간은 우리가 국가폭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남길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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