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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연해주 ‘독립운동가 기념비’, 러시아 극단세력이 훼손… 보훈처는 ‘깜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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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72주년 광복절]장도빈 선생 기념비, 페인트 낙서… 2년전 옮겨졌는데도 보훈처 깜깜

독립운동가 碑, 러시아에서 잇달아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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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혼에 ‘먹칠’ 2013년 8월경 붉은색 스프레이로 훼손된 ‘장도빈 선생 기념비’. 러시아어로 “여기는 러시아 땅이다”라고 쓰여 있다. 러시아 극동연방대 발해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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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빈 선생

러시아 연해주(프리모르스키)는 선사시대부터 옥저, 발해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영욕이 깃든 땅이다. 동아일보는 광복절을 맞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흔적과 발해, 옥저 유적을 취재했다.

이번 취재에서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1888∼1963) 선생 기념비가 4년 전 훼손됐지만 담당 부처인 보훈처는 지금껏 이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운은 연해주에 발해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제기한 사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그는 단재 신채호와 함께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광복 이후 단국대 학장 등을 지냈다. 정부는 산운에게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만난 알렉산드르 크루퍈코 러시아 극동연방대 발해연구소장은 “장도빈 기념비가 2013년 8월경 스프레이 페인트로 훼손된 뒤 시정부의 이전 결정이 내려졌다”며 “한국 민간단체인 고려학술문화재단과 협의해 2015년 10월 극동연방대 사범대로 기념비를 옮겼다”고 밝혔다.

앞서 이 재단과 극동연방대는 2012년 10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레르몬토프 거리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본보가 입수한 훼손 당시 사진을 보면 기념비 앞뒷면에 각각 러시아어로 “여기는 러시아 땅이다”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낙서가 붉은색과 초록색 스프레이로 진하게 칠해져 있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극단주의자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해외 독립운동 기념물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장도빈 기념비가 연해주에 있었는지 몰랐다”며 “민간기관이 세운 기념비를 일일이 관리하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 정부 무관심 속… 이국 땅서 편히 쉬지 못하는 ‘독립투쟁의 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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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팀이 3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극동연방대 사범대 교정에서 촬영한 ‘장도빈 선생 기념비’. 우수리스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허, 분명 이 자리에 있었는데 또 사라졌네요….”

2일(현지 시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크라스노야르 성(城)터.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들어선 거대한 불상 앞에서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3년 전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불상 옆에 설치된 ‘산운 장도빈 선생 기념비’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우수리스크 시내 레르몬토프 공원에 설립된 기념비가 뜬금없이 정체불명의 불상 옆으로 옮겨져 있어서 당시에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 취재팀은 사라진 기념비의 행방을 쫓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우수리스크시와 극동연방대 관계자들을 잇달아 접촉한 끝에 기념비가 크라스노야르 성터에서 극동연방대 사범대 캠퍼스로 2년 전 다시 옮겨진 사실을 확인했다. 제막식을 한 지 불과 5년도 안 돼 기념비를 레르몬토프 공원→크라스노야르 성터→극동연방대로 계속 옮긴 셈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러시아 “연해주는 옛 한민족 땅” 시각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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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한적한 극동연방대 사범대 교정을 찾았다. 기념비는 잿빛 건물들로 둘러싸인 사각형 정원의 한쪽 가장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학생과 직원들에게 기념비가 언제 들어섰는지, 이곳에 자리 잡은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앞서 2012년 10월 기념비가 처음 들어선 우수리스크 레르몬토프 공원에서는 고대 사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발견됐다. 현재 기념비가 위치한 극동연방대 사범대는 산운의 독립운동 혹은 발해사 연구와 무관한 곳이다.

남은 의문을 풀기 위해 극동연방대 발해연구소로 향했다. 루스키섬에서 만난 알렉산드르 크루퍈코 발해연구소장이 전한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2013년 8월 극단주의자로 추정되는 범인의 기념비 훼손 이후 시정부의 이전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일단 기념비를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기 위해 불상 옆에 1년가량 두었다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 측과 협의해 2015년 10월에야 사범대로 옮길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국내의 한 역사전공 교수는 1990년대 초반 학계 인사들과 연해주를 처음 찾았을 때의 분위기를 들려줬다. 당시 러시아 학자와 공직자로 구성된 대표단 관계자들이 만찬에서 “한국과의 역사 교류는 좋지만 연해주 땅을 다시 빼앗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간혹 발해나 옥저를 언급하며 “과거 연해주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 러시아 측의 거부 반응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 연해주 ‘독립운동 기념비’ 훼손 잇달아


사실 러시아 일각의 이런 움직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보훈처 등 관계당국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안중근,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던 연해주에 관련 기념비가 여럿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앞서 2013년에도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대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무단으로 철거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에도 보훈처와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이 아무런 후속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1909년 2월 7일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 의사 등 독립투사 13명이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독립운동을 결의한 일을 기념해 2001년 10월 세운 ‘단지 동맹 기념비’도 방치된 채 훼손됐다. 누군가가 끌로 기념비를 파낸 흔적이 발견됐는데, 특히 ‘한국(Koreya)’이라는 단어가 집중적으로 훼손돼 있었다. 장도빈 기념비처럼 러시아 극단주의 세력이 훼손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보훈처는 민간기관이 해외에 세운 기념비를 관리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입장이다. 산하기관인 독립기념관은 연해주 독립운동 기념비들의 훼손 여부를 파악해 통보해주는 내용의 협약을 2010년 극동연방대 한국학연구소와 맺었지만 이번 훼손과 관련해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산운은 연해주에 발해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분으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사 연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며 “정부가 기념비 관리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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