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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들고 거리나선 건…'독립만세' 아닌 '광복만세' 외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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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장재설 인터뷰

해마다 광복절·삼일절 되면

광화문광장 '서예퍼포먼스'

일제서 '잘살다 자립' 아니니

'광복만세'로 바로잡아야 해

선친은 독립운동가 장용갑

공산당부역…유공자 못 돼

항일운동업적 세상 알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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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그리운 고국 어머니 품으로 통일광복만세.’

72주년을 맞는 15일 광복절.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 나서면 이 문구를 볼 수 있다. 거대한 광목에 대붓으로 한 획 한 획 그어내는 서예퍼포먼스에서다. 올해가 처음은 아니다. 해마다 광복절이면 광화문광장에는 어김없이 광목이 펼쳐진다. 광복절뿐인가. 삼일절에도 나선다. 지난 삼일절엔 ‘3·1만세 정신으로 우리 하나 되자’를 썼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그 일에 매번 나서는 이가 있다. 낙관자리에 ‘항심(恒心) 장재설’이라고 쓰는 이다.

서예가 장재설(70). 평생 붓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대개 벼루와 먹, 붓을 철저히 준비하고 종이 앞에 선다. 하지만 소소한 외출에도 간단한 지필묵을 챙길 만큼 그에게 글씨는 일상이다. 붓글씨 작품을 내다 건 크고 작은 전시가 적잖았다. 그럼에도 그가 가장 공들이는 일은 서예퍼포먼스다. 현장의 기를 모아 세상에 가장 굵직한 흔적을 남기는 그 일 말이다.

글씨를 썼지만 작가로만 산 것은 아니다. 고고한 취미로 소일거릴 삼을 만큼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대붓을 들고 굳이 거리로 나서는 까닭은 뭔가. “나는 서예가로 이름을 알려야 한다.” 이것이 그의 답이다.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선친의 독립운동 업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다른 하나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항일운동한 선친 신원회복이 1순위”

장씨는 충남 홍성 출신 독립운동가 장용갑(1911∼1986) 선생의 4남4녀 중 넷째 아들이다. 장 선생은 일제에 맞서 홍성 일대서 징용반대운동 등을 펼치며 항일에 앞장섰던 인물.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이유에서다. 게다가 유신정권 아래선 거친 송사도 겪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욕설을 했다는 혐의다. 그해 7월 한 버스 안에서 승객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1인독재로 자유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말살됐다”고 말한 게 화근이 됐다. 이틀 뒤 선생은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구속돼 5년형을 구형받았다. 아들 장씨의 항소 끝에 2013년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선생은 타계할 때까지 ‘범죄자’란 낙인을 벗지 못했다.

장씨는 “선친은 일제강점기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지금의 한밭대)를 다니던 중 광주학생운동 반일운동 주도, 결성금광 임금체불 항의, 조선총독부 주민 강제노역 반대운동 등을 주동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홍성공전 시절 11명의 학생이 결성한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대의 활동을 눈여겨봐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득 내민 사진 한 장. 이들이 어느 산사에서 비밀회합을 열고 기념촬영을 한 모습이다. 사진에는 제목도 없는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뜻깊은 사찰/ 등지는 젊은이/ 한 떨기 모란 꽃/ 버리기는 서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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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깊은 사찰에서 모임을 가진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짊어질 것이며 임금의 병풍에 핀 모란꽃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주독립을 버리기가 죽기보다 싫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은 2013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개관 1주년 기념행사로 진행한 사진공모전에 당선돼 한동안 전시되기도 했다.

억울한 건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에 부역했다는 정황. 장씨는 “당시 학교 동문의 부탁으로 선친이 홍성군 은하면 인민위원장으로 두 달여 부역한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공산당 살생부에 적힌 지역우익인사 100여명을 살려냈고 은하면에선 단 1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들 장씨의 신원회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국가보훈처는 ‘공적 내용에 대한 활동 당시의 객관적 입증자료 미비’를 들어 독립유공자 선정을 거부한 바 있다.

△‘독립만세’ 틀렸다 ‘광복만세’라 해야

장씨가 바로잡고 싶은 ‘잘못된 역사’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 하나가 ‘독립만세’다. 광복 70년을 넘긴 지금까지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게 잘못됐다는 거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광복만세’다. “부모가 자식을 잘 키워서 내보낼 때 ‘독립시켰다’고 하지 않느냐. ‘독립만세’라고 하면 일제 아래 잘 먹고 잘살다가 자립한 것밖에 되지 않으니 ‘광복만세’가 맞다.” 서예퍼포먼스에 나설 때마다 그가 ‘광복만세’를 쓰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 세워진 독립문의 현판도 장씨가 바로잡고 싶은 역사 중 하나다. 현판글씨를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이 썼다는 것이다. 근거가 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의 연재기사인 ‘내 동리 명물’이 독립문의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고 밝힌 것이다. “교북동 큰 길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그 위에 새긴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은 다른 이완용이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하지만 이외에 독립문 현판을 누가 썼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는 상태다.

△서예 독학…한문도 선친에게 배운 게 전부

선친의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발동한 연좌제는 장씨의 발목을 여러 차례 잡았다. 젊은 시절 한국보안공사에 합격한 뒤 28일 만에 권고사직 당한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탓이었나. 장씨는 ‘제도권 진입’을 일찌감치 포기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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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도 마찬가지다. 정통글씨를 배운 적이 없다. 한문도 선친에게서 받은 교육이 전부라고 했다. 손글씨로 인품까지 평가하던 시절 늘 듣던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이 힘이 됐다. 그렇게 홀로 쓰고 썼다. 장씨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안 쓰는 글씨를 쓰게 됐다”고 말한다.

글씨에 자신이 생기자 서예대회에 출품하면 상을 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단다. 하지만 주위서 만류했다. 상처만 받게 될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정통’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장씨는 “이단이다, 스승이 없다, 낙관이 틀렸다 등 비난이 몰아쳤고 오히려 그 덕에 많이 알려졌다”며 씁쓸히 웃는다. 원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이었던 셈인가. “사실 정통은 아무리 잘 써도 알아주질 않는다. 나는 내 글씨를 쓸 뿐이다.”

호를 딴 ‘항심체’ 혹은 이름을 딴 ‘재설체’. 독특한 서체에 이름을 달아준 것도 그 자신이다. 수많은 사연을 품은 항심체·재설체를 무기 삼아 그는 올해도 광화문광장에 나설 거다. 장검 휘두르듯 단숨에 죽죽 그어내리는 직필로 소리없이 ‘광복만세’를 외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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