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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의 내 인생의 책] ①시네마토그래프에대한 단상 | 로베르 브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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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 ‘생각의 오아시스’

아마 누구나 가방 속에 책 한 권은 넣어 가지고 다닐 것이다. 예기치 않게 약속이 미뤄지거나 뜬금없이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약속과 약속 사이에 아주 애매하게 틈이 생겨버릴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사랑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낮의 휴식. 이 선물과도 같은 시간. 그때를 대비하여 들고 다니는 책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가벼울 것. 아무 페이지에서 시작해서 아무 페이지에서 끝나도 상관없을 것. 들고 다니다 낡아서 버리고 새 책을 사기에도 부담이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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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단 한마디로 위대한 로베르 브레송이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자신의 연출에 관한 방법론에 의지해서 말하는 이 아름답기 짝이 없는 영화의 존재론에 관한 단상들은 구구절절 눈부시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의 그 무언가를 건드린다. 먼저 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순서대로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무 데나 펼쳐서 읽기 시작한 다음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 별다른 표시를 하지 않고 덮었다. 수백 번, 아니 정말 과장 없이 수천 번을 뒤적거렸지만 어쩌면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이미 내가 읽은 구절인데도 시간이 지나 다시 읽을 때 마치 처음 읽는 것 같은 어떤 일깨움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거기에 밑줄도 쳐 있고 심지어 떠오른 어떤 생각을 써 넣기도 했는데도 항상 그러했다. 그때마다 나 자신에게 감사하게 된다. 무언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생각을 끌어내고 있고 그걸 이 책의 어느 문장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는 것 같은 기쁨에 사로잡힌다. 내가 들고 다니는 이 책은 벌써 열 권도 넘게 새로 산 판본이다. 아마 곧 또 새 책을 사야 할 것 같다.

<정성일 | 영화평론가·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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