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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논설위원이 간다] ‘수행기사 폭언 갑질’ 블랙리스트 나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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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 애환 일깨운 ‘종근당 사건’

운전에서 집안일까지 노동 착취

인간적 모욕·수모 견디는 이유는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

젊은 층 관심 갖는 새 트렌드 부상

갑을문화 청산 위한 시민교육 필요

고대훈의 Fact&Fiction
중앙일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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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사에 대한 ‘갑(甲)질’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힐 만하면 도지곤 한다. 지난 2일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상습적 욕설과 불법 운전을 지시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앞서 몽고식품 김만식 회장(2015년 9월), 대림산업 이해욱 부회장(2016년 3월), 현대BNG스틸 정일선 사장(2016년 4월)이 자신의 수행기사에게 폭행·폭언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나 수사까지 받는 사회적 물의를 빚으며 망신을 당했다. 학습효과가 있을 법한데 막말, 욕설, 불법 운전 강요 등 일부 계층의 갑질은 왜 끊이질 않나.

#‘인턴’(2015년)=70세 벤(로버트 드니로)이 스타트업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30세 최고경영자(CEO) 줄스(앤 해서웨이)를 도와 성공 스토리를 엮어 내는 과정을 그렸다. ‘꼰대’와 신세대의 불편한 동거를 우정과 신뢰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모티브로 ‘수행기사’를 설정했다. 벤은 젊은 여사장 집으로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은 퇴근 때까지 기다리다 모시고 귀가한다. 여사장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입을 열지 않고, 따뜻한 수프를 사다 주는 등 수행기사의 모델을 보여줬다.

#‘특별시민’(2017년)=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가 고깃집에서 자신의 치부와 약점을 알고 있는 수행기사의 입에 상추쌈을 욱여넣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부정을 함께 저지른 두 사람이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입을 다물라는 경고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수행기사는 ‘인턴’처럼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도 하고 ‘특별시민’처럼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 될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회장님’ ‘사장님’ 등으로 통칭되는 고용주를 모시고 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업계에서는 ‘수행기사’라고 부른다. 출퇴근뿐만 아니라 잡일과 의전에 비서 역할까지 맡아 하기 때문이다. 차 안이라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많은 탓에 ‘모시는 분’의 사생활을 낱낱이 알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고용주는 처우를 배려하고 신경을 꽤 쓴다. 특히 정치인이나 공직자 등 힘깨나 쓴다는 인사들은 수행기사의 ‘을(乙)질’을 경계한다. 2015년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 자신의 운전기사의 폭로로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명박 정권 실세였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파이시티 로비 의혹을 폭로하겠다는 운전기사의 협박 글이 발견돼 법정에 서는 등 곤욕을 치른 사례는 부지기수다. 반대로 절대적인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돼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해도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을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놀라운 사실은 수행기사들이 폭언·폭행 사건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수행기사를 괴롭히는 작태는 오늘도 진행형이라고 한다. 단지 ‘종근당’이 잘 알려진 회사라서 언론과 세상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지 소문나지 않은 중소기업 회장들의 수행기사 갑질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반사로 벌어진다고 한다. 수행기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들의 애환이 생생하게 묻어나 있다. ‘노예’ ‘머슴’이라는 자조적 단어가 열악한 환경을 짐작하게 한다. S카페에는 ‘백미러 보다가 맞은 수행기사 있나요’ ‘주 6~7일 근무하지만 연봉 3000만원도 안 되네요’ ‘노예라고 느껴지네요’ 등 다양한 하소연이 쏟아져 있다.

고용주의 갑질 유형은 다양하다. 운전할 때 뒷좌석에서 이래라저래라 꼬치꼬치 주문하는 리모컨형부터 욕설과 폭행을 가하는 조폭형까지 있다. 이장한 회장은 “애비가 뭐하는 놈인데… 너네 부모가 불쌍하다” 등 모욕적인 언사가 그대로 노출돼 분노를 샀다. 몽고식품 김 회장의 경우 “신발 두 개 다 던지고 양말 다 던지고 머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핸들을 놨었다”는 폭로가 나오기도 했다. 김학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정욕구’로 갑질의 원인을 설명한다. 김 교수는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정욕구”라며 “운전기사 폭언·폭행 사건 등 주변에서 목격되는 갑질 행위들은 일종의 인정중독 현상”이라고 말했다.

수행기사들은 왜 인간적인 수모와 모욕을 참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털어놓는다. 개인 기업의 수행기사 김모(36)씨는 “수행기사 한 명을 구하는 구인광고가 뜨면 보통 100명 이상이 몰린다”며 “일자리는 적고 공급은 넘쳐나니 생계를 생각하면 쉽사리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자구책으로 수행기사들은 블랙리스트(기피 인물 명단)를 공유한다. 의류회사 여성 오너의 수행비서 유모(26)씨는 “‘어떤 회사의 누구를 모시느냐’는 수행기사들에게 생사가 걸린 문제”라며 “인터넷 카페에서 특정인의 평판과 정보를 교환한다”고 했다. 300여 명의 수행기사가 가입한 비공개 카페의 회장을 맡고 있는 현직 수행기사 이모(58)씨의 증언이다.

-‘종근당 사건’을 접한 느낌은.

=“수행기사 생활을 하면서 일상적으로 접해온 일이어서 충격적이지 않다. 폭언·폭행 사건은 특별한 게 아니라 지금도 어디선가 발생하는 흔한 일이다. 고용주와 수행기사는 지시와 복종의 관계다. 수행기사를 소모품으로 알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일자리를 잃을까 봐 입도 뻥끗하지 못한다.”

-수행기사 일의 범위는.

=“운전부터 가사도우미 역할까지 자질구레한 것을 다 시킨다. 회사일, 집안일, 창고 정리 등 해야 할 일과 업무 태도를 담은 수행기사 매뉴얼이라는 게 있다. ‘출근 30분 전에 무조건 대기하기’ ‘화초에 물 주기’ 등 세세하게 매뉴얼에 적혀 있다.”

-블랙리스트는 어떤 것인가.

=“카페에서 회원들끼리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공유한다. 흔히 ‘진상 오너’에게 겪은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며 피하라고 권한다. 구체적으로 기업과 고용주의 이름을 적은 명단 형태는 아니지만 수행기사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으로 적혀 있다.”

수행기사 교육기관인 한국팔로워십센터 이준의 대표는 “과거처럼 인사만 잘하고 문만 잘 열어주던 시대는 끝났다”며 “목적의식을 가진 젊은 층이 늘고 있다”고 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벤치마킹하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도시락 회사를 창업하려는 사람이 도시락 회사 사장의 수행기사로 들어가 경영 노하우를 곁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갑은 스스로 우등한 존재이며 열등한 을을 맘대로 다뤄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내재돼 있다”며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민교육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고대훈 논설위원

※이 기사 작성에는 김솔(한양대 영어영문학과 4년)·이유진(중앙대 사회복지학과 3년)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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