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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김진우의 도쿄리포트]하루키 제친 ‘아라한’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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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출판계 100세 전후 저자 베스트셀러 오르는 등 인기

“인생 선배 얘기 듣고 싶다” 주로 60~80대 여성들 공감

경향신문

<90세. 뭐가 경사냐>.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를 제치고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에세이집이다. 지난해 8월 출간돼 90만부 넘게 팔렸다. 저자는 올해 93세의 ‘할머니’ 작가 사토 아이코(佐藤愛子). 90세를 넘은 노작가가 스마트폰, 장난전화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놓고 “하나 하나 시끄럽네”라며 거침없는 입담으로 풀어내 많은 공감을 얻었다.

26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에선 최근 100세를 전후한 할머니 저자들이 인생을 풀어낸 에세이집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출판계에선 이런 책들을 가리켜 ‘100세 전후’라는 뜻의 영어 ‘Around Hundred’를 줄여 ‘아라한’ 책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9월 출판된 다카하시 사치에(高橋幸枝·100)의 <100세 정신과의사가 발견한 마음의 안배>는 지금까지 26만부가 팔렸다. 저자는 70년 가까이 환자들을 대한 경험을 토대로 “다른 사람을 너무 신경 쓰면 결국 손해” “죽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 마찬가지” 등 삶의 조언을 정리했다. 독자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책을 낸 아스카신샤의 담당 편집자는 “대단한 말이 쓰여 있지 않지만 누가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연륜의 무게가 다르다”라고 말했다.

이 출판사에선 2010년 여류 시인 시바타 도요(당시 98세)의 <약해지지 마>를 출간한 것을 비롯해, 89세의 아마추어 사진가 니시모토 기미코의 <혼자가 아니에요>, 94세의 할머니 패션모델 도코미 에미코의 <할머니는 패션모델>을 펴냈다.

일본 출판계에서 ‘할머니 책’이 금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2012년 노틀담 세이신가쿠인 이사장인 와타나베 가즈코(渡邊和子) 수녀(90)의 에세이집 <놓인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다. 이 책은 당시 초판만 1만부를 찍었고, 여성 고객이 많은 시내 서점에 책을 내놓기만 하면 팔려나갔다고 한다. 독자가 보내온 감상 편지만 6000통에 이른다. 지금까지 230만부가 팔렸다.

현역 화가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시노다 도코(篠田桃紅·104)의 <103세가 돼 알게 된 것>은 2015년 4월 출간된 후 50만부가 팔렸다. 속편까지 나왔다. 같은 해 일본 최초의 여성보도사진가인 사사모토 쓰네코(笹本恒子·102)의 <호기심 걸, 지금 101세>도 인기를 모았다.

올해도 고야산 절 주지승의 어머니인 소에다 기요미(添田淸美)의 <고야산에 살아서 97세, 지금 자신에게 감사한다>, 생활평론가인 요시자와 히사코(吉澤久子)의 <99세로부터 당신에게, 언제까지 변하지 않는 중요한 것> 등의 출간이 이어지고 있다.

출판계에서 이런 책들을 ‘아라한 책’으로 따로 분류한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80세도 저자로선 아직 젊고, 70대는 너무 젊다”라고 말했다.

‘아라한 책’의 독자들은 주로 60~80대 여성이다. 출판사 겐토샤의 스즈키 에미 편집장은 “이들은 책에서 앎을 찾으려는 마지막 세대로, 삶이 망설여질 때 서점을 찾는다”면서 “앞으로도 수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라한 책’은 책 표지나 띠지에 저자의 연령을 눈에 띄게 표시하고 있다.

실제 2014년 창간된 잡지 ‘쓰루토하나’는 70세 이상들만 등장한다. 표지의 대부분을 고령의 여성이 장식하고 있다. 오카도 기누에 편집장(62)은 ‘인생의 선배를 만나 얘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에 이 잡지를 창간했다. 책에는 영국에서 자원봉사활동을 계속해온 81세, 하이힐을 소화하는 73세 할머니가 등장한다. 오카도 편집장은 “자유로운 생활이나 망설임 없는 행동, 얽매이지 않는 생각에 공감한다”라고 말했다.

독자들은 ‘아라한 책’에서 무엇을 찾는 걸까. 할머니 저자들의 “의존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근사함”이 공통점으로 거론된다. 자유기고가 나가에 아키라(永江郞)는 “이들은 그 세대에서 압도적인 소수이자 특별한 사람들이다. 시대와 싸워왔지만 이를 자랑스러운 듯 내비치지 않는다. 딸 세대가 동경하는 롤모델”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선 1990년대에 여고생, 2000년대에는 오네(여성이 쓰는 말이나 몸짓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가 ‘붐’을 일으켰다. 나가에는 “사회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말하는 것에 세상은 공명한다. 지금은 그게 할머니”라고 말했다.

<김진우 특파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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