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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김성탁의 유레카, 유럽] “영국 시민권 땄는데 … 언제 네 나라로 가냐 대놓고 묻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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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결정 후 외국인 혐오 뚜렷

EU 출신 대졸자 56% “곧 떠날 것”

전문 인력 공백 걱정하는 목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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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가 가져올 변화를 두고 런던에선 낙관과 우려가 교차한다.빨간 2층버스를 타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런던=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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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서랍장 위에 내 카드 있을 텐데 좀 찾아봐 줘.”

지난 13일(현지시간) 오후 영국 런던 옥스포드 서커스역 인근 쇼핑가.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인파로 넘치는 거리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젊은 한국 여성 관광객이 휴대전화로 통화 중이었다. 인근 정류장에서 런던의 상징인 빨간 이층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의 피부색은 다양했다. 동남아시아 출신 아시아인과 흑인, 백인 등이 섞여 있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는 이들 사이에선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인도어, 이탈리아어 등 온갖 언어가 튀어나왔다.

런던은 21세기 ‘세계의 수도’로 불린다. 뉴욕타임스(NYT)는 “백악관이 있는 워싱턴과 국제 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 브로드웨이의 뉴욕,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의 특징을 모두 가진 곳이 런던”이라고 표현했다. 영국 행정의 중심이면서 뮤지컬 등 공연장이 즐비한 웨스트 앤드와 글로벌 금융기관의 허브인 런던 시티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런던은 다문화의 도시다. 270개국에서 온 870만명이 거주 중이다. 개방과 관용이 런던의 경쟁력이 됐다. 2차대전 후 감소하던 런던의 인구는 2000년부터 증가세다. 런던의 1인당 생산액은 1997년 2만 파운드에서 2013년 4만 파운드로 뛰었다. 세계 부호들은 런던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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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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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통과 1년을 넘었지만, 겉보기에 런던은 달라진 것이 없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나고, 도시의 활력도 그대로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런던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은 예전 같지 않다. 런던 곳곳에서 만난 런던 시민들에게선 낙관론과 우려가 교차하고 있었다.

유로스타 열차가 출발하는 세인트 판크라스역도 그 현장 중 하나였다. 1994년 도버해협 지하터널을 통해 런던과 파리·브뤼셀을 2시간 30분정도에 연결하는 노선이 개통되면서 섬나라 영국은 대륙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영국인 호텔 컨설턴트 필립 몬스(54)는 “외국 젊은이들의 런던 유입이 줄면 활력이 떨어질테니 걱정이지만 정치권의 누구도 어리석은 협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취업 비자 발급 연봉기준 3만 파운드로 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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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금융인 에므릭 드 벨.[런던=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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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행 열차를 기다리던 크리스찬 이킴(26)도 브렉시트 협상을 통해 결국 영국과 EU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피력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 사는 이킴은 “11년간 런던을 오가고 있지만 외국이라고 느껴본 적 없다”며 “런던의 다문화 커뮤니티가 금융산업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영국이 큰 변화를 선택하진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반응은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서 탈퇴하는 ‘하드 브렉시트’를 추진해온 테리사 메이 총리의 보수당이 지난 6월 총선에서 과반을 상실한 이후 브렉시트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든 것과 무관치 않아보였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런던대 연합 학생회관에서 만난 영국 대학생 조디 브래드쇼(18)는 “이미 인종 차별이나 외국인 혐오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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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대 대학생들. [런던=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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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신 젊은이들은 영국 내 취업난을 걱정했다. 영국 비즈니스 스쿨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뒤 프랑스로 돌아가는 줄리 모린(21)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EU 이민자들을 꺼릴 것이고 자유롭게 입국할 수 없는 국경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가시적 움직임이 있다. 영국 정부는 회사 보증 취업비자(일반 유형)를 발급하는 연봉 기준을 2015년 2만800파운드에서 현재 3만파운드로 조정했다. 외국인 유입에 장벽을 치려는 조치라는 반응이 나온다. 워킹홀리데이로 런던 물류회사에 다니던 윤모(32)씨는 “정식 취업비자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연봉 기준을 갑자기 올리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유럽 대도시에 금융허브 지위 내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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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이주를 고민하는 프랑스 출신 앙트완 두카텔. [런던=김성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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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엑소더스 조짐도 감지된다.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지난달 영국 250개 상장사의 EU 출신 대졸 이상 학력자를 조사한 결과 56%가 브렉시트 협상이 끝나기 전 영국을 떠날 가능성이 크다고 답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탄소배출권 트레이더 마르신 사이아자는 런던에 있는 지인들이 구직 요청을 많이 해오자 웹사이트를 만들었는데, 지난 5월 구직자가 2000명이 넘어서면서 아예 전문 알선업에 나섰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EU 주요 14개 회원국에서 온 110만 명 가운데 40%가 숙련 노동자인 반면 영국인의 이 비율은 28%에 그쳐,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전문 인력 공백에 처할 것이란 관측을 뒷받침했다.

금융가인 뱅크역 인근 유럽투자은행 건물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 에므릭 드 벨(32)은 “런던은 서열을 중시하는 프랑스와 달리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곳이었지만 결국 파리와 프랑크푸르트, 룩셈부르크 등에 (금융 허브) 지위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시 프랑스 출신으로 7년째 런던에 살고 있는 은행원 앙트완 두카델(35)도 “주변에 유럽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불확실성이 너무 큰 상황이 몹시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옥스퍼드 서커스역 인근 공사장에서 만난 코소보 출신 페흐미(39)는 “불법체류를 했다가 시민권을 땄다”며 “브렉시트 투표 이후 ‘언제 네 나라로 돌아갈 거냐’고 대놓고 묻는 영국인들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브렉시트 협상 마감 시한은 2019년 3월. 앞으로 1년8개월간 영국과 EU의 협상에서 런던의 운명이 결정된다. 분명한 것 한가지는 런던 시민 대부분은 런던이 앞으로도 글로벌 수도로 남기를 바란다는 사실이다. 그럴수 있을까. 런던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김성탁 런던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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