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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MBC 몰락 10년사③ : ‘드라마 왕국’을 폐허로 만든 MBC 사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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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노조원들이 7월 13일 서울 상암MBC 1층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MBC는 사장 물러나라고 소리쳤다는 이유로 김민식 PD(가운데)를 징계하기 위해 인사위원회를 열었다. / 김영민 기자

요즘 잘 나가는 작가 유시민이 수배 등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1980년대. 그가 MBC에서 드라마 작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8부작 미니시리즈를 필명으로 각색했던 그는 1989년에 유시민 본인의 이름으로 <신(新)용비어천가>라는 드라마의 대본을 썼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등장과 당시 언론사 내부의 상황이었다. 당시 신군부는 정직한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했고, 언론사는 권력을 잡은 권력자를 찬양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권력에 취한 인간 군상들의 욕망과 비겁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MBC와 꼭 닮은 설정이다.

민주화가 된 이후라고 해도, 1989년이면 군부 출신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도 MBC에서는 이렇게 현실을 비판하는 실험적인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다. 1991년에는 해방 전후사와 6·25전쟁에 대해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 <여명의 눈동자>가 제작되었다. ‘드라마 왕국 MBC’가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무엇보다 MBC에서는 연출자와 작가가 자유롭게 주제의식을 표현할 수 있었고, 때문에 좋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일일이 거명할 수도 없는 숱한 화제작들이 MBC를 통해 방영되었다.

드라마 왕국 MBC, 이제 그런 MBC는 없다. MBC 드라마 현장은 폐허가 되었다. ‘드라마 왕국 MBC’ 덕에 월급 잘 받고, 어디 가서 MBC 직원이라고 떵떵거리던 이들에 의해 MBC 드라마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망가진 뉴스에 희생된 드라마 PD들

MBC 편성표를 보면 8시 MBC 뉴스데스크를 각각의 일일드라마 두 편이 둘러싸고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다. 지상파, 종편, 그 어디에도 이런 편성은 없다. 왜 이럴까? 김재철 사장 시절부터 뉴스데스크의 시청률과 신뢰도, 영향력은 하염없이 추락했다. 경영진은 시청률이라도 잡을 요량으로 중독성 있는 일일드라마를 뉴스 앞에 한 편, 뉴스 뒤에 또 한 편 편성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이른바 드라마 인접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자체 경쟁력이 없는 뉴스가 드라마 덕에 살아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망한 뉴스의 여파는 드라마로 옮겨갔다.

비슷한 성격의 일일 드라마 두 편을 연속 편성하니 쓸 만한 작가나 배우를 캐스팅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광고주가 그 나물에 그 밥인 내용과 인물들에게 매력이나 느낄 수 있겠는가? 드라마본부 관계자들이 경영진에게 이런 상황을 계속 경고했지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광고는 빠지고 일일드라마 적자가 한 해 50억∼60억원씩 쌓여갔다. 적자의 책임은 고스란히 드라마 PD들에게 전가되었다. 일일드라마들의 적자가 부담이 되니 드라마 수뇌부들은 새로운 실험과 시도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런 악순환 속에 드라마 PD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안광한 전 사장은 사실상 이 일의 책임자라 할 수 있다. 그가 부사장으로 있던 2013년에 이 희한한 편성은 시작되었고, 그가 사장으로 있던 2014년부터 드라마본부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무리한 편성을 그만두라며 아우성을 쳤다. 그는 모든 요구를 외면했다. PD 출신이라고 하지만, 연출자로서의 커리어는 거의 없는 안 전 사장은 편성 쪽에서 주로 일을 했다. 그는 과거 리니어(linear)한 편성만 고집하는 구시대적 인물이었다. 그나마 핵심 시간대에 시청률이 부진한 뉴스를 일일드라마 두 편으로 근근하게 버티는 상황에 안주했다. 그는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드라마 부문을 옥죄면서 성과를 요구했다. 그는 MBC 드라마를 출세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안광한 사장은 2014년 3월 임기를 시작했다. 신인급 배우 정우식은 2014년 4월부터 MBC 드라마 <개과천선>을 시작으로 <야경꾼일지> <오만과 편견> <빛나거나 미치거나> <딱 너같은 딸> <화려한 유혹> <옥중화>까지 내리 7편에 출연했다.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그의 캐스팅은 드라마본부장이 직접 신경을 썼는데 신인배우 100여명이 오디션을 거친 역할에 그가 ‘꽂힌’ 작품도 있을 정도였다. 때로 신인 치고 너무 높은 출연료를 불러 제작진이 난색을 보일 때는 “출연료를 올려서라도 반드시 캐스팅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드라마본부장은 PD들에게 ‘안광한 사장의 부탁’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PD들은 참담했다. 배우 정우식이 바로 박근혜 정부 비선실세로 알려진 정윤회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안광한 사장과 정윤회가 시내 모처에서 만났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는 사실이 아니라고 방방 뛰었지만 정윤회는 만난 사실을 인정해버렸다.

사장 김장겸과 PD 김민식

사장과 본부장이 정윤회의 아들을 챙기는 동안 MBC의 유능한 드라마 PD들은 속속 빠져나갔다. 지난 2년간 10여명의 드라마 PD들이 회사를 떠났다. 떠난 PD들의 작품을 봐도 <선덕여왕> <해를 품은 달> <개와 늑대의 시간> <파스타> 등 최근 10년간 MBC를 빛냈던 대표 드라마들이다. 케이블과 종편, 연예기획사까지 유능한 PD를 찾는 데 사활을 걸었는데, 거꾸로 MBC 경영진은 PD들을 무시하고 작품에 간섭했다. 안 떠날 이유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던 드라마본부장은 4년 넘게 자리를 지켰고, 지방사 사장으로 영전했다.

최근 “김장겸 사장은 물러나라”는 MBC 구성원들의 투쟁에서 가장 앞장서고 있는 김민식 PD. 그는 드라마 PD였다. 시트콤과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일가견이 있는 그를 경영진은 조합 집행부를 했다는 이유로 철저히 탄압했다. 특히 오랜 기간 현 김장겸 사장이 김민식 PD를 미워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김 PD가 일일 드라마를 살리겠다며 톱 배우를 섭외하고 준비에 들어갔지만 김장겸 당시 보도국장이 강력하게 막아 무산되었다고 한다. 김 PD는 굴하지 않고 기획을 계속해 나갔는데, 작가와 함께 기획하고 작업에 들어갔던 작품들 중에는 법정 드라마와 웹툰 원작의 청춘 드라마가 있었다. 하나는 나중에 SBS에서 방영되어 2013년 올해의 드라마가 된 <너의 목소리가 들려>였고, 또 하나는 윤태호 원작의 <미생>이었다. 김 PD는 2015년 말 결국 드라마본부에서 완전히 내쫓겨 송출실로 강제 발령이 났다.

좋은 드라마 한 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때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한국 TV 시청자여서 행복한 이유는 양질의 드라마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런 행복을 MBC 사장들은 시청자로부터 빼앗아갔다. 권력자의 놀이터가 된 MBC 드라마를 시청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가 되었다. MBC에서 김장겸 사장이 나가고 김민식 PD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날을 간절히 기대하는 이유다.

<김재영 ‘PD수첩’ 등 연출, 현재 송출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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