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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아이돌 성장·눈물 덧씌운 기괴한 ‘서바이벌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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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기이한 학교가 있다. 입학 조건은 단 한 가지, ‘예쁘면 된다’. 경쟁 대신 걸그룹의 꿈을 이루기 위한 소녀들의 성장에 중점을 뒀다며 ‘한국 최초의 아이돌 전문기관’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다르다. 지난 7월 13일 전파를 탄 엠넷(Mnet)의 프로그램 <아이돌학교> 얘기다.

방송 전부터 성 상품화 등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프로그램은 ‘졸업’과 함께 걸그룹으로 데뷔하는 9명을 뽑기 위해 ‘입학생’ 참가자 40명이 경쟁을 벌이는 내용이다. ‘픽미’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성공을 거둔 엠넷의 전작 <프로듀스 101>의 복제품 아니냐는 지적에 연출을 맡은 신유선 PD는 “연습생 서바이벌이 아닌 일반인의 성장을 지켜보고 데뷔까지 이끌어주는 리얼리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공개된 내용은 더 노골적인 ‘줄 세우기’였다.

지난 7월 13일 첫 방송을 시작한 엠넷의 예능 프로그램 <아이돌학교> 제작발표회의 모습.

“당신의 선택이 연습생 운명을 결정”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이 ‘성장’할 기회를 얻기도 전인 첫회부터 이들의 순위를 실시간으로 공개한다. 카메라가 참가자의 모습을 비출 때마다 화면 한쪽에는 그의 현재 순위도 함께 노출한다. 중간성적을 발표하며 카메라는 꼴찌 학생의 당황한 표정을 가혹할 정도로 오래 비춘다. 결국 ‘서바이벌이 아니’라던 프로그램은 방송 2회만에 성적이 낮은 학생 8명을 2주 후 퇴교시킨다는 ‘중대 발표’를 하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에게 “학생들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며 어김없이 ARS 문자투표를 독려한다.

반드시 걸그룹으로 데뷔하는 꿈을 이루고 싶다며 매회마다 눈물을 터뜨리는 소녀들 앞에서 시청자들은 잔혹한 ‘생존게임’에 혀를 차면서도, 결국 자신이 응원하는 참가자를 낙오시키지 않기 위해 문자투표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한 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 “극강의 길티 플레저”라는 평을 동시에 받은 <프로듀스 101>과 동일한 구조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KBS <가요톱텐>부터 시작해 오디션 프로그램 시대를 열었던 엠넷 <슈퍼스타K>까지, 가수와 음악에 순위를 매기는 TV쇼는 과거부터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해 방영한 <프로듀스 101> 시즌1을 시작으로 ‘능력=계급’을 표방한 아이돌 서열화는 더욱 극적인 형태로 진화했다.

<프로듀스 101>에서 연습생들은 각각 A에서 F등급으로 나누어져 아예 등급이 크게 표시된 옷을 입고, 새로 순위가 발표될 때마다 피라미드형 무대에 일등부터 꼴등까지 순서대로 앉는다. 그 자체로 경쟁사회의 축소판이다.

이 거대한 계급의 피라미드에서 ‘국민 프로듀서’라 불리는 시청자들은 연습생의 24시간을 쫓아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노출되는 그들의 실력과 인성, 매력과 사생활까지 평가해 점수를 준다. 프로그램의 캐치프레이즈는 더 노골적이다. “당신의 선택이 소녀(소년)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런 방식의 프로그램은 팬덤의 변화 역시 추동했다. 과거 ‘오빠부대’라는 말은 ‘내 새끼는 내가 키운다’ 류의 정서로 변화하고 있다. 이른바 ‘양육자 팬덤’이다. 스타는 더 이상 숭배와 동경의 대상만이 아니다. 내가 점 찍은 아이돌이 미숙했던 연습생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데뷔에 이르기까지, 스타의 성장과 함께하는 방식의 팬덤이다.

팬들이 스타를 관리하는 새로운 팬덤

<프로듀스 101>에서 팬들이 스스로를 연습생의 ‘맘(Mom)’이나 ‘앰(애미의 줄임말)’으로 지칭하는 것이나, 연습생에 대한 지지나 지지 철회를 ‘입양’, ‘파양’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온라인에서 돈을 모아 ‘우리 OO 데뷔시켜주세요’라는 지하철 역사 광고를 하고, 주변의 인터넷 아이디까지 끌어모아 점 찍은 연습생에게 투표해 순위를 올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지난 6월 결성된 ‘워너원’ 데뷔조에서 유력 연습생들이 예상을 깨고 탈락하자, 일부 팬들이 이들의 ‘구명’을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해당 연습생 그룹의 2013년 발표곡을 음원 차트에서 ‘역주행’시킨 것도 이런 집단적인 팬덤이 만든 결과다.

<프로듀스 101>에서 아이돌 ‘줄 세우기’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피라미드형 무대 구조다. 순위 발표식 때마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순서대로 앉는 경쟁사회의 축소판이다.

대중문화비평가 방연주씨는 “과거 전통적인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선 팬들의 참여방법이 ARS 문자투표를 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SNS의 등장으로 매체 환경이 크게 변화하면서 팬들이 여러 채널로 기획사나 프로그램 제작진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구조가 됐다”면서 “한편으로는 스타 양성 시스템에 팬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참여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일각에선 팬덤화가 다소 극성스럽고 편향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팬과 스타의 권력관계 역시 변화하고 있다. 지난 2월 1세대 아이돌 그룹 H.O.T 출신의 문희준에 대한 팬들의 지지 철회 선언이나 연이은 슈퍼주니어 멤버 성민에 대한 팬들의 보이콧이 대표적인 사례다. 거짓말, 무성의한 태도 등 팬에 대한 기만과 질 낮은 콘서트 등 소위 말해 팬을 ‘호구’로 봤다는 것이 보이콧의 이유인데, 스타의 팬 역시 ‘소비자’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돌 문화를 연구해온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소장은 이런 팬덤의 변화를 “친밀성의 상품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김 소장은 “기획사나 방송 제작진은 데뷔 전부터 연습생의 사생활을 계속해서 노출하고, 이에 따라 팬과 시청자는 이들의 사생활을 상품처럼 구매하고 소비하게 됐다”면서 “이 과정에서 스타가 팬들을 소위 ‘조련’하기도 하지만, 팬들이 한편으로 스타를 관리하는 새로운 팬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이런 현상은 <프로듀스 101> 등 엠넷의 연이은 아이돌 데뷔 프로그램에서 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미 2010년 초반부터 서서히 등장해 왔던 흐름”이라면서 “이제 아이돌 마케팅은 팬덤은 스타를 관리하고, 기획사는 이런 팬덤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획사 아이돌은 1위를 하면 수익을 얻지만, 팬이 얻는 것은 ‘내가 1위를 만들었다’ 혹은 ‘데뷔를 시켰다’는 만족감이다. ‘생존’과 ‘방출’이 갈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이런 만족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더 없이 효과적인 구조다. 방연주 비평가는 “현실이 빡빡하고 경쟁에 내몰릴수록 TV 속 극단적 경쟁구조에서 아이돌이 성장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지원하며 시청자는 대리만족을 느낀다”면서 “방송사 입장에서도 이런 팬덤을 통해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고, 광고효과나 수익도 동시에 따라오기 때문에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돌 지망생의 눈물겨운 분투기와 이를 상품화하는 방송사, TV 속 경쟁에 몰두하며 대리만족을 찾는 시청자의 욕망이 겹쳐지고 있다는 얘기다.

‘성장 스토리’ 입힌 치열한 생존극

“열심히 배우고 성장하겠습니다.” <아이돌학교>는 매회 1등을 한 ‘반장’의 ‘차렷, 경례’ 구령에 맞춰 참가자들의 이 같은 인사로 시작된다. 현실보다 노골적인 서열화 방식의 데뷔 프로그램에 제작진은 언제나 ‘성장 서사’를 덧씌운다. 13살 어린 학생부터 24세 성인을 막론하고 아이돌그룹 지망생들은 교복을 입고 출연하고, 이들을 ‘키워야 할’, 혹은 이들의 ‘운명을 쥔’ <프로듀스 101>의 ‘국민 프로듀서’는 <아이돌학교>에선 아예 ‘육성회원’으로 지칭됐다. 앞선 프로그램에서는 1인당 투표할 수 있는 연습생 수가 제한돼 시청자의 ‘견제픽’ 등 치열한 ‘픽 전략’을 낳았던 투표 시스템도 <아이돌학교>에서는 아예 40명 전원에게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방송사로선 수익을 더 올릴 수 있는 구조다.

<아이돌학교> 제작진은 출연자 모집 때부터 ‘예쁘면 된다’며 이를 노골적으로 광고 문구로 내걸었다. Mnet

성 상품화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노력으로 성장해가는 학생들의 꿈이 이뤄지는 학교’를 내걸었지만, 일본식 교복인 세일러복부터 이제는 일본에서도 입지 않는다는 부르마(짧은 기장의 체육복)까지, 성애적 코드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아이돌학교>의 ‘교가’라며 공개된 ‘예쁘니까’ 뮤직비디오 영상에서는 잔디밭에서 춤을 추는 출연자들 사이로 맥락도 없이 스프링클러가 터져 이들의 옷을 적시는 장면이 담겼다. 앞선 홍보 영상에서도 ‘무대 위기 대처술’이라며 참가자들에게 폭우 속 젖은 교복을 입고 춤을 추게 하고, ‘폐활량 훈련’이라며 아예 수영장에 빠뜨려 젖은 모습을 화면으로 내보낸다. 이쯤 되면 “성 상품화를 넘어 가학적인 수준”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여기에 온통 분홍색으로 칠했을 뿐 과거의 군대 내무반을 연상시키는 숙소에 교관까지. “진짜 군대 같았어요. 핑크빛 군대!”. 2회 방송에서 한 출연자의 말이다.

아이돌학교 교장으로 출연한 배우 이순재 역시 “순결하고 아름다운 소녀들” “소녀들은 어느 기간을 넘어서면 시집을 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돼야 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에 불을 붙였다. 담임교사 역할을 맡은 슈퍼주니어 출신 김희철은 “인터넷의 (성 상품화 관련) 글들을 봤을 때 굉장히 불편했다. 성 상품화가 목적이었다면 회사에서도 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냈고, 제작진 역시 ‘방송을 보고 확인하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공개된 내용은 논란에 기름을 붓기에 충분했다.

숱한 논란에도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입증하듯, 시청률은 나쁘지 않다. 1회 시청률은 평균 2.3%(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프로듀스 101> 시즌2 첫방 시청률보다 높다.

제작진은 신입생 모집 영상에서 “5000만을 넘어 전 세계 60억을 입덕시킬 아이돌 인재”를 탄생시킨다고 했다. K팝 수출의 임무까지 부여된 이 아이돌 인재들은 이런 ‘학교’라는 이름의 기이한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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