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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놀이와 범죄 사이… 내 안의 또 다른 나 '자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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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들의 '自作 캐릭터 놀이']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 관련 논란

아이돌·만화 등 다양한 주제 설정, 가상의 캐릭터 만들어 역할 놀이

"현실·환상 구분 못 하는 게 문제… 무조건 제지보다 陽地로 이끌어야"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장민지(가명·12)양은 지난 4일 부모님에게 '자작(自作) 캐릭터 놀이'를 하는 걸 들켜 크게 혼나고 스마트폰까지 압수당했다. 장양은 최근 몇 달간 학교 친구들과 함께 카카오톡 단체채팅방(단톡방)을 만들어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 멤버들과 연애한다는 설정의 역할극을 하면서 놀았다. 장양이 방탄소년단의 한 멤버역을 맡았고, 다른 아이들은 저마다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마치 연애하듯 카톡을 주고받으며 연기했다. 아이들은 이 놀이를 하면서 키스뿐 아니라 성행위를 암시하는 대화까지 나눴다. 장양의 부모는 "성인들이나 할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고 놀랐다"며 "이런 놀이에 빠졌다가 인천에서 살인을 저지른 학생처럼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3월 8세 초등생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김모(17)양과 공범 박모(18)양은 이런 '자캐(자작 캐릭터) 놀이'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이들은 지난 2월 트위터상에서 만나 살인을 주제로 한 역할극 등 극단적인 '자캐 놀이'를 하며 어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10대 문화였던 자캐 놀이가 바로 직격탄을 맞았다. 트위터나 포털사이트 카페 등의 자캐 놀이 계정에 '정신병자 같은 짓을 그만두라'는 등 비난 댓글이 수백건씩 쏟아졌다. 몇몇 일선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자캐 놀이를 즐기는 학생을 조사했다. 인터넷에선 '김양 같은 일부 극단적 경우를 예로 들어 자캐 놀이 문화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건 억울한 처사'라는 반론도 나왔다.

조선일보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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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 놀이는 2010년쯤부터 10대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놀이 문화다.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수십명까지 참가하는 일종의 역할극. 포털사이트나 소셜미디어에 단톡방이나 카페 등을 만든 뒤 역할극의 주제를 정한다. 멤버들은 각자 역할을 맡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일종의 집단 창작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동경하는 아이돌 가수와의 연애나 여행 같은 가벼운 주제부터 추리극이나 환상 세계로의 모험, 수퍼 히어로나 좀비물 등 하위 문화에서 자주 쓰는 설정을 비틀어 자기들만의 역할극을 만든다. 과거 아이돌가수 팬끼리 향유하던 '팬픽(팬이 아이돌가수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나 만화 팬들이 즐기던 '코스프레(캐릭터 흉내 놀이)'가 소셜미디어를 매개로 발전한 형식에 가깝다.

미국이나 일본에선 이런 역할극이 아예 '던전앤드래곤스'나 '소드월드' 같은 게임으로 발전해 수십만명이 즐기는 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에서는 장양처럼 취향이 맞는 친구끼리 즐기기도 하지만, 트위터 등에서 자캐 놀이 멤버를 공개 모집하는 경우도 많다. 19일 포털사이트에서 '자캐' '멤버 모집' 등의 키워드로 검색해보니 지난 1년간 올라온 자캐 놀이 모집글만 3000건이 넘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민정(17)양은 "한 반에 적어도 3~4명은 자캐 놀이를 하고 있거나 즐긴 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김양처럼 극단적 주제로 자캐 놀이를 즐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신고를 받아 이런 성향의 자캐 놀이 커뮤니티를 폐쇄하고 있지만, 트위터나 카톡 등을 이용하면 속수무책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엽기적인 자캐 놀이는 특성상 소셜미디어에서 은밀하고 폐쇄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를 방치하면 범죄로 폭주할 수 있다"며 "놀이 자체가 위험하다기보다는 김양처럼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지나치게 몰입하도록 방치되는 게 더 문제"라고 했다.

자캐 놀이를 무조건 막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10대들의 놀이 문화를 무조건 막고 금지하면 오히려 음지로 파고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자캐 놀이를 양지(陽地)에서 즐기게 하면서 부모나 교사의 적절한 지도를 받도록 유도하는 게 더 좋은 해법"이라고 말했다.

[권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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