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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선] 남북대화 조급증 버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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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50년 만에 처음으로 3박4일 일정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치러진 2000년 8월의 일이다. 북한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첫 상봉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한 장충식 단국대 이사장에게 금강산 면회소 조성 의견을 제시했다. 장 이사장은 반대했다. 그는 고령의 이산가족이 금강산까지 오가는 여정은 부담스러우니 군사분계선 근처에 짓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견해를 북한에 말했다.

북한 제의에 조목조목 반대한 장 이사장은 당시 김대중정부 핵심 실세들에게서 정부의 햇볕정책 추진에 걸림돌이 된다는 불만을 샀다. 그로부터 얼마 뒤 북한은 장 이사장이 보수성향 월간지와 인터뷰한 내용을 문제 삼아 2차 이산상봉을 앞둔 그해 11월 상봉 중단을 위협하고 나왔다. 북한 상봉단이 서울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 정부는 장 이사장의 일본 출국을 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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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외교안보부 차장

그는 회고록에 당시 일화를 기술하며 “통일부나 국가정보원이 북한 측 파트너와 협상을 하거나 우리 쪽 입장을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북측이 하자는 대로 다 수용하고…”라며 아쉬웠던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장 이사장은 적십자사 총재직을 내려놨다. 이듬해인 2001년 북한은 “국군의 훈련은 당연하다”는 당시 홍순영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트집 잡으며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 뒤 홍 장관도 경질됐다.

남북관계 개선과 남북대화 재개 의지가 높은 문재인정부가 17일 북한에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 중단과 이산상봉 논의를 위한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을 제의했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이 독일에서 4대 대북 제안을 내놓은 지 11일 만이다. 문 대통령은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연설(이른바 베를린 구상)에서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 중단 시점으로는 정전협정 체결일(27일)을, 이산상봉 및 성묘 방문일은 10·4 남북정상선언 10주년을 맞이하는 10월4일을 제시했다.

정전협정 체결일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이다. 회담을 준비하기에도 촉박한 일정이다. 우리가 먼저 급하게 서두르는 인상부터 주고 시작하는 것은 회담 주도권 싸움이 불가피한 남북대화에서 피해야 하는 하수(下手)이다. 대화에 매달리고 조급해할수록 북한의 전형적인 갑질에 끌려다닐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북한은 어떻게 해서든 북한과 대화의 문을 열고자 하는 문재인정부의 속마음을 다 읽었을 것이다.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카드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장의 카드가 있다 할지라도 그럴수록 차분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우리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담대한 여정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조급증을 드러내는 것은 담대한 여정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핵·미사일 기술 완성을 목전에 둔 북한이다. 혹시라도 북한이 남북 대화와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와는 다른 목적에서일 것이다. 현 시점은 기본 원칙을 버려가며 저자세로 북한에 끌려다니는 남북대화가 양보와 타협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될 수 없는 엄중한 시기이다. 임기 5년의 민주정부와 장기독재 세습체제와의 대화는 장밋빛 합의보다 기본 원칙에 충실한 대화일 때라야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서 외교안보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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