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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직설]인간의 속성과 모럴 - 고 천이두 선생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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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천이두 선생님을 글로만 뵈었다. 소설가 손창섭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할 때였는데, 그의 평문을 읽고서는 예리한 비평 안목과 해박한 서구문학이론을 한국적 문맥에서 풀어놓는 솜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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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번역물 하나 없던 그 시절에 어떻게 막스 셸러며 도스토옙스키, 앙리 바리뷔스 같은 서구 사상가나 작가들을 섭렵하셨을까. 물론 일본판본이었을 테지만, 우리 시대 지평보다 더 넓은 세계문학사적 지평에서 한국문학을 논하는 선생님의 글이 문학청년에게 중요한 자극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남도에 내려와 선생님이 머물렀던 캠퍼스를 오가며 알게 된 것은 또 다른 선생님의 면모였다. 그는 당대 문학작품을 부지런히 읽고 논하는 실천적인 문학평론가일 뿐 아니라, 그가 발 딛고 있는 토착성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탐구한 국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고유한 미의식을 연구한 <한의 구조 연구>의 저자이자 판소리의 전설인 <판소리 명창 임방울>을 저술하신 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이들 저서에서 ‘한’이 단순히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의 소산이 ‘한’(르상티망)이 아니라 ‘삭임’이라는 내적 수련과 ‘원’(願)이라는 긍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판소리의 ‘시김새’ ‘이면’ ‘그늘’ ‘소극적 수동성’과 함께 있는 중요한 미학적, 윤리적 가치임을 강조한 바 있다. ‘한’에 대한 의식과 강조는 그가 ‘정읍사’ 이후 한국 서정시와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에서 ‘한’의 가락과 풀이를 읽어낼 때 독보적으로 빛을 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고 천이두 선생을 민족주의자로 볼 수도 있으나 글을 읽다보면 그의 ‘한’에 대한 천착과 후속 작업이 거창한 이념의 소산이 아니라 투철한 토착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안의 이매창과 가람 이병기, 서정주의 글에 깃든 ‘호남의 사무치게 구성진 가락’을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춘향가’와 ‘흥보가’에 깃든 전라도의 맛과 멋을 미학적으로 설파해낸 것도 이러한 토착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지난 11일 그의 영결식에 미처 가보지 못한 나는 다음날 연구실에서 색 바랜 그의 평론집을 꺼내들었다. 그의 비평 궤적을 더듬다가 문득 그의 등단작인 <인간 속성과 모럴>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도서관으로 향했고, 내친김에 혼자 하는 추도식이라는 요량으로, 어두컴컴한 지하서고에 들어가 당시 발표지면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마땅히 실려 있어야 할 <현대문학> 1958년 11월호에 그의 글만 정확히 찢겨져 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재하는 ‘인간속성과 모럴’이라니. 그날 종일 나는 이 부재하는 지면을 상상하는 것으로 보냈다. 아마도 자기본위적인 인간의 본성은 모럴이라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요지쯤으로 정리해둘 수도 있겠으나, 이 당위는 너무 단순하다. 더군다나 ‘보편적 가치판단의 기준을 간직하되 완전한 도그마에 떨어지지 않으며, 투철한 지도이념을 제시하되 인습적인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이 떨어지지 않는 비평가’이기를 주문하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한 꿈임을, 그 각각의 요소들이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기보다는 숙명적으로 상호배반의 관계’에 있음을 성찰하고 있던 분이 아니었던가.

또한 서구근대문학에 한국문학을 비춰보다가도 누구보다도 이 땅의 굴곡진 미학에 신명나 하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인간속성과 모럴’은 굳어진 도식이라기보다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항구적으로 변하는 인간속성과 모럴을 의미하는 것일 테고, 이 변전의 지점과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는 화두쯤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느 독일작가는 이런 글을 남겼다. ‘화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잊을 수는 없다.’ 문학과 비평은 인간의 저러한 삶의 밑자리를 살피는 일이고 이 간극에 깃든 수많은 결들을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당위로서 주어진 모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의 구체적 영토가 있다. 그 대지 위에 서면 위 글은 때론 뒤집어지기도 한다. “인간은 용서할 수 없지만 화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있고, 잊을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불합리와 이면, 오류들은 한편 놀라운 기적이기도 하다.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삶의 밑자리에서 그늘과 삭임을 보는 것, 그것은 고 천이두 선생님이 곱게 닦아놓으신 ‘한’의 현재성일 것이다. 큰 자취를 남기고 먼 길 떠나신 천이두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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