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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황대권의 흙과 문명]농업혁명과 생산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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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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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통틀어 지금까지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두 번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약 1만년 전에 있었던 농업혁명이고, 두 번째는 약 100년 전에 있었던 산업혁명이다. 사람들은 지난 100년이 그 이전 1만년보다 변화의 폭과 깊이가 몇 곱절 더 크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그럴지 몰라도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는 농업혁명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변화가 아무리 크게 보여도 농업혁명을 넘어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최근세사이므로 잘 알 수 있지만 농업혁명은 아득한 옛날이라 그 변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가 없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 농업혁명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이론과 책들이 소개됨으로써 그동안 막연하게 “혁명은 진보이고 진보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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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역사에서 인류는 대략 250만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사이 인류는 몇 차례 멸종의 위기를 겪다가 1만년 전 농업혁명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249만년을 수렵채취인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농사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착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인류 역사에 이보다 큰 변화가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문명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내용은 농업혁명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2차, 3차, 4차 혁명도 모두 농업혁명이 이루어 놓은 체제 속에서 이뤄졌거나 벌어지는 일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농업이라는 이 해괴한 관행을 다양한 각도에서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농대를 나온 사회운동가로서 한편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농사짓기를 권유하며 살았다. 그런데 인류문명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아, 무작정 농사를 권유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국가폭력, 생태위기, 계급 차별, 전쟁과 제국주의 등 지금 문명세계의 골치 아픈 문제들이 모두 농업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다가도 “농업이 무슨 죄가 있나. 농사짓는 사람 또는 농업을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지”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말이 안된다.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물적 토대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기농업을 하면 다 해결되는 걸까? 착취적 사회관계를 그대로 놔두고서는 유기농업을 한들 세상이 좋아질 것 같지도 않다. 농사를 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러한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몇 가지 기준점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먼저 인류사의 99.6%를 차지하는 수렵채취시대와 비교해 농업혁명 이후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연구를 살펴보면 첫째,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그와 더불어 착취적 관행과 제도가 만들어졌다. 둘째, 단일 곡식을 먹음으로써 건강이 악화되었다. 셋째, 노동시간이 늘고 노동강도가 몇 배 강해졌다. 넷째, 생태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농업혁명은 물질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진보였지만 인간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인간이 농업을 시작한 이상 그 길은 필연이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농업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농업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 몸의 DNA에 새겨 있는 수렵채취시대의 관행과 지혜를 어떻게 오늘에 되살려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다음은, 농업이 자리 잡은 후 지금까지 인간을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불세출의 경제학자인 칼 마르크스가 잘 밝혀 놓았다. ‘생산수단’이다. 생산수단을 놓아버린 인간은 바로 노예의 처지로 떨어진다. 먹고살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노예의 처지를 벗어나려면 생산수단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작은 규모의 토지나 공장, 단순한 농기구나 기계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대기업의 어마어마한 생산수단은 어떻게 하나? 개인이 소유하기 어려운 규모의 생산수단은 ‘사회화’ 또는 ‘공유화’가 답이다.

그다음의 문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의 ‘갑질’을 어떻게 방지할 것이냐이다. 모두가 소생산자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생산규모의 차이에 따라 부당한 견제와 소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을 조정하라고 정부가 있다.

농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착취의 문명을 끝장내기 위해 그리고 자본에 의한 임노동노예제를 벗어나기 위해 국민 모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길로 나가야 한다. 이 일은 개인의 결단으로 가능하고, 정부는 개인의 결단을 촉진하고 조정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위에 열거한 세 가지 기준점 가운데 수렵채취자의 DNA를 복원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생산수단(돌도끼)의 소유자였으며, 다른 생물들보다 인간이 특별히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철저히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살았다. 인공지능이 안내하는 불안한 신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행복한 자족의 삶을 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분명한 것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자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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