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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굴기의 꽃산 꽃글]실꽃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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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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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따라 떠올랐다가 빗방울과 함께 떨어지고 보니 제주도였다. 공항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직접 몸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에 올라 구름의 근처를 기웃거리고 하늘의 근황을 곁눈질한 셈이었다.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여기에서는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저기에서는 햇빛이 말짱하다.

나는 비가 늘 좋다. 하늘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물질이 아닌가. 공중과 제대로 사귀자면 비를 피하는 게 능사만이 아닐 것이다. 도착하고 이튿날, 한라산 둘레길을 쏘다니는 동안에도 하늘엔 비를 짊어진 구름이 낮게 깔렸다. 산에서 맞는 비는 충분히 색다르다. 제대로 맡은 적이야 없지만 어쩐지,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았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비, 백석)라고 할 때의 그 냄새가 바로 이 냄새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느 너덜겅에 이르니 한라산 특유의 돌들이 웅크리고 있다. 한때 뜨겁게 들끓던 용암이 차분해지다가 오늘은 또 오늘의 빗물에 식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얼크러진 모습을 보자니 엎드리고 있다가 졸지에 화석이 된 생명들도 있을 것만 같았다. 아주 늙은 물개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면서 어이쿠, 자네 이제사 오는가, 인간의 말을 구사하며 악수를 청할 듯한 분위기.

야생화는 늘 피어 있는 게 아니다. 꽃도 나처럼 제게 허락된 시간만큼을 겨우 잘라먹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7월의 제주에서 염두에 둔 몇몇 꽃은 함부로 기회를 주지 않았다. 꼭 그 꽃을 보자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 꽃은 무시로 눈으로 들어왔다. 실꽃풀이다. 심심한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묘한 느낌을 풍기는 꽃이다. 있을 듯 없을 듯한 물큰한 느낌이 이름에서부터 전해졌다. 지상에 떨어진 뒤 세상구경 떠나는 빗방울처럼 똘방똘방한 사연을 간직하는 꽃이 아닐까, 어림짐작하면서 실물을 보았다. 과연 하늘에서 떨어진 비의 마지막 한 토막인 듯 줄기가 바위틈에 꼿꼿하게 박혀 있고 꽃은 가지런히 꽃밥을 층층이 쌓으며 공중으로 올라간다. 빗물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있고 비에는 많은 사연이 들어 있는 법이다. 비와 어우러져 실, 꽃, 풀이라니! 실꽃풀,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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