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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닿은 아련한 온기 - 이태수 작가 ,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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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많은 것들을 바꿔 놓는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담담히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정원의 삶에 스무 살의 생기로 가득한 다림이 들어선다. 나긋하게 닳아버린 줄로만 알았던 감정은 마냥 어여쁜 그녀에게 동요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직업은 변두리 사진관의 사진사다. 현재를 추억하기 위해 순간을 박재하는 소소한 사람들이 그의 사진관을 찾았고, 각자의 특별한 삶의 역사를 기록해갔다.

훗날을 기약할 수 없는 정원은 다림에게 말과 감정을 아낀 채 담담히 남은 시간을 정리해간다. 비 오는 날 한쪽 어깨가 다 젖도록 그녀를 위해 우산을 기울여주면서도 차마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은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남자의 아픈 배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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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수. Point to point 150x150x182(h). 2017. 스테인리스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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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 젊은 작가 이태수의 작품 ‘Point to point’는 결론을 향해 갈 수 없는 둘의 감정처럼 아련한 모습이다. 스틸로 이루어진 남녀의 손의 형상은 등을 맞대고 있다. 수 백 개의 스틸 슬라이스는 점을 향해 뻗어가고, 마주하지 못한 두 손의 형상만이 묘연한 그리움을 전한다. 작품이 품고 있는 아득한 시간성과 향수는 스틸이 가진 차갑고 견고한 물성에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는다.

작가는 주요 도시에 설치한 공공 조형 작품을 비롯하여 10여 년 간 스틸을 익숙하게 다루어왔다. 물성에 대한 경험과 이해만큼 재료는 작가의 손에서 특유의 감성을 수혈받는다. 작가는 번뇌를 은유하듯 108개로 이루어진 스틸 표면에 그라인딩 기법으로 의도적인 상처를 만들어낸다. 주름을 늘려가는 나이테처럼 텍스처가 생긴 스틸 표면은 시간의 층위에서 겪게 되는 무수한 감정과 경험의 기록이기도 하다. 텍스처가 담긴 슬라이스는 다시 하나의 점으로 용접된다. 그 인고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생의 시간과 인연의 의미를 담담히 중첩시킨다.

켜켜이 쌓인 지층처럼 뻗어나가는 슬라이스가 모이는 지점으로 작가가 택한 것은 ‘소실점’이다. 소실점은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점이다. 결국 실체가 없는 현재의 연장이지만, 우리는 그 막연한 지점이 곧 현재임을 자주 잊고 살아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정원에게 현재는 소중하다. 눈부신 여름 햇살 아래 정원은 자주 웃는다. 죽음이 다가온다 해서 과잉한 감정에 포박당하기보다 외려 담담히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순간을 낱낱이 느끼는 모습이다.

인연은 대개 우연히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정원에게 내일이 있었더라면 우연히 다가온 그녀의 손을 잡아챌 수 있었겠지만, 생의 시간이 달라서 연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은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다. 두 손이 끝없이 맞잡고 있다면 서로의 땀이 시큰하게 배어나는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종내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한 채 예쁜 감정만을 나누는 정원과 다림은 우연히 스친 손등처럼 애틋한 여운만을 남기고 지나갔다.

창밖에 보이는 다림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쓴 편지조차 전하지 못한 채 상자 안에 묻어버리는 것은 나의 사랑보다 상대를 아픔을 덜기 위한 배려다. 다림의 아픔마저 마음에 품고 떠나는 길에 자신의 영정사진 하나를 찍었을 뿐 격랑은 없었다. 그리워하지 말라고 담담히 말하듯 정원은 감정을 절제하며 상대의 아픔마저도 자신의 몫으로 남겨둔 채 박명의 다리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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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습니다."

운이 좋게도 정원은 추억이 아닌 진행형의 사랑을 안고 생을 마감했다. 저 끝으로 가는 아득한 점도 결국 순간의 응집이듯, 다만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정원의 8월은 크리스마스처럼 눈부시다.

사랑을 생의 동력 삼아 희망을 저지르지 않았고, 삶과 죽음의 중립에서 다가온 연을 진정으로 아꼈다. 손등을 스친 곳에 남은 아스라한 온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은 아픔으로 소요한 시간 동안 뱉어내지 못한 사랑의 흔적 까닭일 것이며 이루어지지 못한 인연이 수반하는 기약 없는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어느 순간 생의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한들 인연이 스쳐간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김지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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