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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야! 한국 사회] 국립대에 진화생물학을! /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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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1981년 전경련 회관에서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된다. 초대 회장 김영길은 카이스트 재료공학과 교수, 초대 임원 절반이 카이스트 소속이었다. 이들은 학회에 신앙간사라는 직책을 두었는데, 초대 신앙간사 유병우도 카이스트 교수였다. 당시 학회 사무실은 김준곤 목사가 무료로 제공했고, <조선일보> 등의 언론보도를 타고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재벌, 보수기독교, 보수언론의 세 박자, 한국 창조과학의 태초에 카이스트가 있었다.

카이스트가 위치한 대전은 명실상부한 한국 창조과학의 본산이다. 순복음교회의 도움으로 한국 유일의 창조과학관이 건설되었고, 창조과학자인 한동대 총장 김영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곳도 카이스트다. 그뿐인가,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과학분과 위원장 장순흥은 창조과학회 대전지부 소속으로 아마도 미래창조과학부라는 명칭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박정희와 미국의 공조로 탄생한 한국 과학의 중심 카이스트가 사이비 과학의 대표주자인 창조과학 성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며칠 전 카이스트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 정용훈은 후쿠시마에 사람이 살아도 문제없다는 주장으로 화제의 인물이 됐다. 학자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일개 카이스트 교수가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면 좀 어떤가. 문제는 카이스트가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성공시키는 자산이 되었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할 때 생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정용훈의 발언은 역사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박정희는 한국 사회의 과학을 정치에 종속시켰다. 그 시작이 카이스트였고, 그 카이스트가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한국 과학의 자존심이라는 대학이 과거에 갇혀 있다.

얼마 전 광화문1번가에서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ESC’가 한국 과학기술을 위한 제안을 했다. 그 다양한 목소리는 ‘기초학문의 복원’, ‘다양성의 추구’ 그리고 ‘과학에서의 민주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카이스트 생명과학과에는 진화생물학을 전공한 교수가 단 한 명도 없다. 한국 국공립 대학이 기초학문과 학문 다양성의 수호자로 기능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생명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진화생물학이 카이스트에선 선택과목이다. 당장 미국 하버드대학의 커리큘럼과 생명과학 관련 전공을 찾아보라. 한국 과학의 자존심이라는 대학의 기초과학 수준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적 성장에 집착해온 한국 과학기술은 선진국 추격형 연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의 기저에 기초가 부실한 우리의 현주소가 있다. 기초와 다양성을 보장해야 할 국가연구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바로 그 적폐의 결실이 창조과학의 성지이자 진화생물학 없는 카이스트다. 국공립대 통합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이참에 국공립대 존재의 이유를 좀 따져 물어야 한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학은 유행을 좇지 말고, 기초와 토대가 되는 교육과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립대엔 의무적으로 진화생물학 연구자들을 뽑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창조과학자들을 꾸중할 수 있겠는가. 진화생물학자 흉내를 내는 연예인스러운 학자가 방송에 나와 창조과학자들을 욕하는 것보다, 한국의 자연을 진화생물학의 시선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질 때, 카이스트의 창조과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인선이 마무리되었다. 창조과학자와 책을 썼던 인물이다.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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