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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HIV 낙인지표조사, 감염인의 성장 이야기 / 정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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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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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욜
‘한국 HIV 낙인지표조사’ 기획단 코디네이터·인권재단사람


“처음 확진을 받고 나서 누구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사촌형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심리적인 안정감이 느껴지더라고. 조사에 참여하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어 좋았어. 서로 비밀을 공유했다는 생각도 들고, 만난 사람들과 더 단단해진 느낌이야.”

‘한국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낙인지표조사’에 참여한 한 감염인의 이야기다. 그는 감염 확진 이후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해준 사촌형의 태도에 ‘더 살아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겼고,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를 산다고 이야기했다.

‘한국 HIV 낙인지표조사’는 2016년 한 해 동안 15명의 HIV 감염인 조사원들이 104명의 감염인을 만나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물이다. 유엔에이즈(UNAIDS)에서 제시한 공통설문을 바탕으로 전 세계 90개국에서 이미 활용된 연구방법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처음 진행됐다.

6주 동안 교육을 받은 조사원들은 1명당 7명의 감염인을 만났고,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한 사람을 선택해 긴 생애사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설문조사만 2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만큼 질문 하나하나에 공을 들여야 했고, 감염인 조사원들이 어떤 질문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낙인과 차별이 무엇인지 공부해야 했다. 인권침해 때 구제받는 법, 심층인터뷰 방법도 교육받았다. 조사 결과 하나하나를 되짚어보며 토론하고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 모두 조사원들과 함께 진행했다.

‘연구’ 경험이 전혀 없는 감염인들이 왜 조사원으로 참여했을까. 그들은 자신이 받았던 지지의 경험을 돌려주고 싶어 했다. 인터뷰 방법이 서툴렀을지 모르고, 잊고 싶었던 상처가 떠올랐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심만은 그 어떤 연구보다 높았을 것이다. 15명의 감염인 조사원들과 설문 응답자들은 아픔들의 연대 속에서 서로의 ‘편’이 된 소중한 경험을 했다.

연구 결과, 내재적 낙인의 수준이 매우 높음을 확인했다. 10명 중 7~8명은 자신을 탓하고 있었고, HIV 감염 사실이 소문날까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응답한 이도 상당했다. 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자신을 드러낼 수 없으니 직접 경험한 차별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감염인들이 경험하는 차별이 적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이 겪은 일을 ‘차별’로 인식하기보다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 짊어지고 갈 업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개인의 존엄과 인권이 미뤄지는 상황에서 적극 항의하기보다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에이즈 혐오 앞에 작아진 이들은 ‘인권’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다.

에이즈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편견에 도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비밀, 죽음의 병, 문란하다는 도덕적 낙인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 며칠 전 열린 퀴어문화축제에 감염인들의 자조모임연합인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가 참석하였다. 처음에는 얼굴 드러내기가 두렵다며 참여 자체를 꺼리던 감염인들이 ‘한국 HIV 낙인지표조사’ 보고서를 시민들과 공유하며 후원과 지지를 요청했다. 설문조사를 진행한 조사원, 조사에 참여한 이들이 함께였다. ‘낙인’을 알아간 시간이 아픔으로만 남지 않고, ‘축제’를 통해 결과를 시민들과 공유하면서 성장의 발판이 되었길 진심으로 바란다. 켜켜이 쌓여 가는 차별의 경험을 이제는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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