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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년 전 일제에 짓밟힌 ‘용산의 아픔’ 생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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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미군 이전 일본군 강제수용 기록 발굴 첫 공개

경향신문

1906년 일본군이 서울 용산에 군기지를 조성하기 전 토지강제수용을 위해 작성한 문건에 포함된 용산지역의 지도. 용산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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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의 ‘평택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미군기지가 없는 용산의 모습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45년 미군이 서울 용산을 차지하기 전, 또 1908년 일본군이 용산을 군사용지로 사용하기 전 용산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이다.

구한말, 서울 용산은 원효로 일대 ‘용산방’과 후암·이태원·서빙고동 일대 ‘둔지방’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둔지방 중 ‘둔지미 마을’은 용산 기지가 생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곳이다. 1906년 6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채 1년이 안 되는 기간 약 300만평 규모의 땅 중 약 118만평이 일제 군용지로 수용됐다. 그나마도 마을 사람들이 수용에 격렬하게 저항해 당초보다 수용 규모가 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당시 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을 합해 총 1만4111가구의 가옥과 10만7428평의 전답이 있었다. 기지 조성을 위해 파헤쳐진 무덤만 12만8970총에 이른다.

이처럼 폭력적이었던 일제의 용산 군용지 수용 당시의 기록을 담은 문건이 111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서울 용산구는 1906년 일본군이 용산기지 조성에 앞서 작성한 61쪽 분량의 문건을 13일 공개했다. 문건에는 일제가 용산 군용지를 수용하면서 조사한 가옥과 묘지, 전답 등의 구체적인 수치는 물론, 군용지 수용을 둘러싸고 당시 한국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부’, 일본 육군성 사이에서 오간 대화내용도 담겨 있다.

문건을 발굴한 용산문화원의 지역사 연구가 김천수씨(41)는 일본 정부의 디지털 문서 보존소인 ‘아시아역사 자료센터’에서 수십만건의 문서를 조회한 끝에 2014년 해당 문건을 찾아냈다. 일본 방위성이 공개한 이 문서를 김씨는 지난 3년간 분석했다. 김씨는 “용산기지가 외국군 주둔의 역사로 점철된 곳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곳은 기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용산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한이 담긴 장소”라고 말했다.

문건에는 약 300만평에 이르는 군용지 면적과 경계선이 표시된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상세지도)’도 실려 있다. 용산구 관계자는 “명세도에는 대촌, 단내촌 등 옛 둔지미 마을들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명세도에는 또 후암동~서빙고동 사이 옛길도 그려져 있다. 조선통신사가 도성을 나온 후 일본으로 향할 때 지난 길로 알려진 곳이다. 구 관계자는 “후암동~서빙고동 사이 옛길은 용산공원 조성 과정에서 충분히 복원 가능하다”며 “이번 문건이 용산공원 조성 과정에도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용산구는 이번 문건 공개를 계기로 용산공원의 역사성과 장소성에 대한 연구를 보다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김천수씨는 국가공원을 조성할 때도 미군기지였던 공원부지가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용산이) 공원으로 돌아왔을 때, 군사기지로서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지 조성 이전 삶의 터전으로서의 역사를 이해한 후 (공원 조성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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