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39126042 0352017071339126042 02 0213001 6.0.16-HOTFIX 35 한겨레 0 popular

용산기지는 애초 300만평이었다

글자크기
[한겨레] 용산문화원, 일제의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 발굴

주민 저항과 토지 수요 변경으로 118만평으로 줄어

용산기지의 옛 이름은 ‘둔지산’에서 유래한 ‘둔지방’

조선 때 삼남 가는 ‘용인로’, ‘만초천’ 지류도 표시

발굴자 “1세기 전만 해도 이 곳은 일반인 삶의 터”



한겨레

1906년 일본군이 작성한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의 지도. 붉은 선이 이번에 반환되는 용산 기지이며, 파란 선은 만초천 지류다. 한자로 적은 당시 지명에 한글을 추가했고, 현재 들어선 시설도 파란 점과 함께 추가로 표시했다. 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용산기지는 애초 300만평으로 계획됐으나, 당시 주민들의 저항으로 118만평으로 줄어들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은 일본군이 용산기지를 조성하기에 앞서 1906년 작성한 계획 문서인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를 발굴, 공개했다. 이 문서를 보면, 애초 용산기지의 규모는 300만평으로 계획됐다. 그러나 이 지역 마을 주민들의 저항이 계속됐고, 일본군의 토지 수요가 변경됨에 따라 1908년 118만평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군의 강제수용에 강력히 저항했다. 1905년 8월 일본군이 일방적인 강제수용을 발표하자, 용산 주민 1600여명이 한성부에 찾아가 항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들은 폭행, 체포하고 강제수용을 강행했다. 이 지역에 대한 강제수용은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실행됐다. 그러나 용산기지 남쪽에 포함된 대촌와 단내촌은 1916년에 수용되는 등 계획보다 늦어지기도 했다.

한겨레

일본군 부대가 들어선 일제 시대의 용산기지 모습. 용산문화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용산 군용지 수용을 둘러싸고 한국주차군의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령관이 1905년 3월 일본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신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있다. 이 편지에서 하세가와는 “토지 수용이 늦어짐에 따라 매점이 일어나 지가가 점차 상승하니 하루 빨리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육군성의 수용 지시를 받은 하세가와는 넉 달 뒤인 7월 대한제국 이지용 내부대신에게 “용산, 평양, 의주의 군용지 1000만평을 수용할 것이며, 배상비로 20만원을 주겠다. 이 돈을 적절히 그 소유자에게 배당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 문서에는 일본군이 조사한 당시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실려있다. 지금은 이 일대를 용산, 용산기지라고 부르지만, 당시 이 지역의 큰 지명은 용산이 아니라 ‘둔지방’이었다. 둔지방은 용산기지와 후암동, 이태원동, 서빙고동 일대를 이르는 지명이었다. ‘둔지방’이란 지명은 이 일대의 옛 이름인 ‘둔지미’(둔지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둔지미’는 평지 가운데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뜻한다고 배우리 땅이름학회 명예회장은 설명했다. 둔지산은 국립중앙박물관 바로 위에 있었다. 조선 시대에 용산은 현재의 용산성당과 용마루고개, 만리재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한겨레

옛 서울의 둔지방 신촌(새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미군의 드래곤힐호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용산기지 안에는 마을도 여럿 있었다. 현재의 미군의 드래곤힐호텔 자리에는 신촌(새말)이 있었고, 국방부 남쪽에는 정자동,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단내촌(제단안말), 박물관 바로 위 둔지산 아래에는 대촌(큰말)이 있었다. 이들 4개 마을에는 대략 300~400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산기지 안에는 무덤도 11만개 정도로 매우 많았는데, 이 일대는 조선 시대 한양의 공동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에는 옛 길과 하천도 표시돼 있다. 남대문에서 후암동, 이태원, 서빙고 나루로 이어지는 길은 조선 시대에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가는 ‘용인로’였다. 또 후암동에서 미군기지를 관통해 신촌과 정자동, 대촌을 지나 동작나루(현재의 동작대교)로 가는 길도 있었다. 용산기지의 북쪽을 동서로 흐르는 하천도 표시돼 있는데, 만초천(욱천)의 지류다. 현재도 이 하천의 일부가 용산기지 안에 남아 있다.

한겨레

용산기지 북쪽 메인포스트를 동서로 흐르는 만초천 지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용산문화원 김천수 역사문화연구실장이 일본의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운영하는 인터넷사이트 ‘아시아역사자료’(jacar.go.jp)에서 찾아냈다. 김 실장은 “용산기지를 외국군 주둔지로만 인식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이 곳은 일반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말했다. 용산구는 오는 11월 <용산기지와 둔지미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책을 펴낼 계획이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사람과 동물을 잇다 : 애니멀피플]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 볼만한 영상 - TV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