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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낡은 古書, 손때 묻은 향로… '시간'을 그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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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런던서 동시에 전시 여는 극사실주의 화가 이진용 인터뷰]

25년간 중국 오가며 수집한 목판활자 활용해 新作 선보여

"땅에서 막 발굴한 유물처럼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 담아"

"만리장성 쌓듯 노동한다"는 화가 이진용(56)은 '시간'을 그린다. 오래돼 누렇게 바랜 고서(古書), 선인들 손때 묻은 향로, 세월을 대물림해 닳고 닳은 여행 가방이 화폭을 메운다. 1호 세필(細筆)로 2m에 달하는 캔버스를 석 달, 넉 달에 걸쳐 수행하듯 그린 극사실주의 회화. 하루 3시간 자며 중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작업 여정에도 시간을 입히기 위해서"다. "어릴 적 산사(山寺)에 가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댓돌에 깊은 구멍을 내는 모습이 신기했어요. 시간의 힘이죠. 우둔한 선비처럼 가장 미련한 방식으로 그림 그리는 것이 저는 정말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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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책’연작은 이진용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작품이다. 천년 수도원에서 막 꺼내온 듯한 고서들을 낱장 한 장까지 세밀히 묘사한 이 작품은 가로 길이만 3m75㎝에 달한다. /성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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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4년 만에 새로운 노동의 산물을 선보인다. 30일 서울 학고재 갤러리와 런던 폰톤 갤러리에서 동시 개막하는 '컨티뉴엄(continuum)' 전시다. 트레이드 마크인 '책' 연작(Hardbacks Series)과 함께 3년 전 시작한 '활자(Type)' 작업을 본격 소개한다.

400~500년 된 중국 목판활자가 재료다. 골동 수집광인 그가 25년 전부터 중국을 들락거리며 모아온 것들이다. "종이와 테라코타, 세라믹 성분을 찰흙처럼 만든 뒤 나무 활자를 본떠요. 수백 개 활자본을 하나하나 판에 붙이고 석분으로 채색한 뒤 물로 헹구고 햇볕에 말리는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오래돼 먼지가 쌓인 듯한 질감을 얻게 되지요."

오래된 사찰 혹은 고택 정원에 박힌 돌방석처럼 보이는 이 작업을 작가는 '조각그림'이라 부른다. 동그라미, 사각 형태의 크고 작은 '조각그림' 180여 점이 전시장 벽면을 메운 풍경이 장대하다. "작은 입자들이 모여 활자를 이루고, 그 활자들이 모여 세상을, 아니 우주를 만들어가지요." 평론가 윤재갑은 "간절히 기도할 때 두 눈을 감듯, 이진용의 그림은 눈을 감고 오감(五感)으로 느껴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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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을 소재로 한‘컨티뉴엄’. /학고재 갤러리


부산에서 소문난 '천재 소년 화가'였다. 중 1이던 열세 살, 무심코 그린 교탁 옆 노란 주전자 그림을 보고 선생님이 "솔거보다 잘 그렸네" 하신 칭찬이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동아대 조소과 졸업에 유명 스승을 둔 것도 아니라, 틈만 나면 국전 같은 공모전에 출품해 이름을 알렸다. 부산에선 열아홉 살에, 서울에선 1993년 박여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동서양 고서와 도자기, 트렁크 등을 사진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한 이진용의 작품은 미국 등 서양 컬렉터들이 먼저 알아보고 사 갔다.

부산 달맞이고개와 해운대, 기장에 다섯 곳 작업실을 두고 눈만 뜨면 '노동하는'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 "김정숙 여사가 제 작품 소장자예요. 청와대 비서실장 마감하고 양산 내려와 사실 때 부산 어느 갤러리를 통해 석 점을 구입하셨다고 들었어요. 달맞이고개 작업실로 차 드시러 종종 오셨는데 제가 '아주머니'라고 불렀지요(웃음)."

이번에 첫선을 보인 '컨티뉴엄' 시리즈도 흥미롭다. 일본 에도시대 부엉이 향로와 독일 쾰른박물관에서 구입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상(모형)으로 제작한 이른바 '셀프 화석' 작업이다. "향로와 비너스 조각상을 본뜬 뒤 그것들을 땅속에 몇 달간 묻었다가 꺼내 털어내고 다시 묻고 꺼내는 행위를 반복해 시간을 입혔지요. 땅에서 막 꺼낸 유물처럼 켜켜이 쌓인 시간, 역사의 무게가 주는 기운을 느끼게 하고 싶었습니다." 오래된 물건만 보면 발동이 걸리는 수집광 이진용의 괴짜 기질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전시다. 7월 30일까지. (02)720-1524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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