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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투표날 하루 잠시 주인, 그리고 다시 자발적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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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미연 포럼] '공익(公益)'과 '국익(國益)'이라는 이름의 무익(無益)함

사람들은 대부분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고민한다. 물론 이에 대해 마땅한 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혹자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본질적 활동을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는 쉽게 말해 인간으로 일단 잘 먹고, 싸고, 번식하고, 운동하고, 감각하면서 본질적 능력인 이성의 기능을 잘 발휘하여 잘 존재하거나 잘 지내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웰빙(well-being)'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인간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 혹은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하는 사상들도 있다.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그중 하나인데, 이는 바로 인간의 쾌락과 행복을 늘리는데 기여하는 행위는 선하고 고통과 불행을 늘리는데 기여하는 행위는 악하다고 보는 사상이다. 더 나아가 이는 사회의 행복을 최대로 하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행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목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s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혹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도록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어떤 행위든 그 행위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 다수의 이해관계 당사자들에게 최대의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면 그 행위는 옳은 행위, 즉 선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얼핏 보기에 그럴듯하다. 그러나 한 개인이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매번 자신의 행위로 영향을 받는 다수의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최대 '행복'이나 '이익'이라는 결과를 따지면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불편하고 효용성이 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사실 일상에서는 매번 자주 그렇게 하는 것 같지 않고 대부분은 그저 관습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공리주의 원리는 개인의 행위보다는 국가적 차원의 입법이나 정책, 제도, 사업에 적용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가가 어떤 정책이나 사업을 입안하고 결정하고 추진하고 시행하는 과정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국가가 그러한 일들을 도모하는 경우 그것들이 국민들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반드시 따져 봐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개인이나 국가가 공리주의 원리에 따라 가능한 한 최대다수에게 최대이익을 가져다주거나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하겠다는 데는 별다른 토를 달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상에는 적용상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기본적으로 공익, 달리 말해 국익을 내세우는 이른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국익을 위해 소수나 약자를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몇몇 사람들을 혹은 변변치 않은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인체실험을 해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인 질병에서 벗어나는 이익을 얻게 된다면 그러한 희생양을 이용하는 행위가 정당화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어떤 일을 도모함으로써 그것이 공익, 즉 국익에 이바지하는지를 어떻게 누가 따져야 하는지의 문제다. 이것을 따져보는 방식으로 가장 흔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비용편익분석(費用便益分析, cost-benefit analysis)이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정확할 것으로 보이는 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러한 분석방식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우리는 국민이나 공공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지기 위해서는 금전적 가치와 같은 양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강이나 생명 그리고 환경과 같은 질적 가치를 고려해야 하는데 양적으로 계산하고 비교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비용편익분석에서는 이런 질적 가치가 양적 가치로 환원될 수 있을지가 문제다.

그리고 4대강 사업과 같이 복잡계인 환경을 대규모로 일거에 조작하는 엄청난 일을 벌이면서 이것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 작동할지를 그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러한 예측과 결정을 전문가들이나 관료 혹은 대리인들에게 맡기기가 쉬운데 이럴 경우 그들의 이익, 가치,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그래서 4대강 사업과 같은 국가적인 대규모 사업은 분명 홍수 예방 및 방어, 지구온난화 해소, 수질개선 및 생태복원, 수자원확보, 일자리 창출, 관광객 유치 등 국익 및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사업이 공익적 성격을 갖는지, 아니면 일부 건설사의 이권을 위한 것이었는지, 대통령의 치적을 위한 것이었는지 등 사업타당성과 관련해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게다가 수질악화 등 각종 부작용 및 무용함이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책감사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국가 경제정책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국가 경제정책의 유일한 목적은 국민들을 잘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관료나 정책입안자들이나 집행자들과 같은 대리인들 그리고 기득권 동맹세력들만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 모두가 잘 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국익이고 공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날 인구에 빈번히 회자되는 '양극화'가 이를 전적으로 대변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양극화가 극심한 세계적인 불평등국가로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경제구조가 불평등하고 노동착취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부의 분배가 지나치게 부자들에게 몰려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국가경제정책은 물론 개인에 의해 좌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국민 모두가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정책도 아마 전문가나 관료와 같은 대리인들 혹은 우리 사회 돈과 권력을 거머쥔 기득권 동맹세력들의 의중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이러한 정책 결정에는 비용편익분석과 마찬가지로 전문가나 대리인 등의 이익, 가치, 편견이 개입되게 마련이고 정책 목표나 방향은 국익을 표방하나 필연적으로 일부 이해관계집단의 이익 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목표는 애매하고 모호하기까지 하여 '최대다수' 혹은 '최대행복'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해석되거나 강조되어 적용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 국가 정책은 '최대다수의 행복'이라는 분배 위주가 아니라 '최대행복'이라는 성장 위주의 정책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국가 전체의 최대행복이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라면, 다시 말해 파이를 키우는 일이라면 소수의 희생정도가 아니라 다수이며 약자인 일반 국민 대부분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부 수출 대기업의 이윤과 경제적 가치 혹은 경영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노동계급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국민 85%가 종사하고 있는 중소기업을 착취하며 영세자영업자나 농업인들을 붕괴시키는 것이 이러한 정책 방향의 일환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를 일컬어 오늘날 우리는 '양극화 사회'뿐만 아니라, '격차사회' 혹은 '새로운 신분제 사회'라 한다. 이는 마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커녕 '최대다수의 최대 불행'과 '최대 소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극단의 목표로 치닫는 사회라고 과하게 표현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고소득층의 삶은 인류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화로운 소비생활을 누릴 수 있으나, 저소득층은 근근이 삶을 영위해 가는 그런 사회라는 말이다.

이는 얼토당토않은 얘기가 아니다. 올해 우리나라 정부가 정한 2인 가구 최저 월 생계비가 월 169만 원이다. 이는 연소득으로 합치면 2000만 원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체 일해서 먹고사는 사람 중 아무리 적게 잡아도 3분의 1 정도가 연봉 2000만 원 이하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3분의 1이 최저 생계비로 가장 기본적인 삶을 근근이 영위해 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다.

국가가 경제정책을 세우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유일한 목적은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하기 위한 기본적 수단은 '일자리'와 '소득'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일자리는 소득도 신분도 불안한 비정규직 비율이 유난히 높은 데다 정규직 전환이나 진입도 유난히 어렵다는 보고가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지난해 기준으로 32.8% 정도이고, 임시근로자 비중도 OECD 평균 임시직 비중 11.4%의 두 배에 육박하는 22.3%라고 한다. 청년들의 경우, 이를테면 15~24세에 해당하는 국민들의 경우 남성은 53% 여성은 47%가 비정규직이고 임금도 정규직의 53%라고 한다. 청년들 절반 이상이 첫 직장생활을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는 셈이다.

소득편중 현상도 심각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고용률 차이는 대기업이 15%이고 중소기업이 85%인데 반해 순이익은 대기업이 72%를 가져간다고 한다. 이런 기업 간의 불균형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임금 측면에서도 그 차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1980년에는 그래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차이가 대기업이 100%라고 하면 중소기업 중 전산업이 96.7%, 제조업이 91.0%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중소기업임금이 대기업 임금의 90%를 넘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기업 100%라면 중소기업 중 전산업 60.6%이고 제조업 54.1%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한 격차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근로자라는 사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이나 복지 등의 격차가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임금은 2003년에서 2008년까지는 정규직의 60%대 수준이었으나 갈수록 벌어져서 지난해는 53.5%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있다. 특히 현대자동차의 경우 원청과 하청 기업 간의 임금 격차를 비교해 보니 원청기업(현대자동차)이 100%라면 1차 부품공급업체가 60.6%이고, 2차 부품공급업체는 36.2%이며, 3차 부품공급업체는 24.5%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제는 더 낮은 임금을 받는 국민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반면 더 높은 임금을 받는 국민의 수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사회보험에서도 비정규직의 처우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국민연금 가입률의 경우 정규직이 82.9%인데 반해 비정규직이 36.3%로 차이가 크다. 건강보험 가입률 역시 정규직 86.2%, 비정규직 44.8%로 격차가 크다. 그리고 정규직은 85.5%가 퇴직금을 받는 반면, 비정규직은 40.9%에 불과하다. 상여금 역시 정규직은 85.4%가 혜택을 보지만 비정규직은 불과 38.2%만이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가계를 최상위 10%와 최하위 10%로 나누어서 비교해 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놀랍게도 임금 소득 기준으로 상위 10%가 국민소득의 절반 수준을 가져간다. 자본 소득 기준, 즉 주식 배당소득을 보면 상위 10%가 95%를 가져간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재벌저격수로 알려져 있고 얼마 전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발탁된 장하성 교수에 따르면, 전체 경제활동을 통해 만들어낸 경제 총소득(GNI)의 분배를 비율로 따져보니 1980년에는 가계소득이 72.1%에서 2015년에는 62.1%로 하락했고, 정부소득은 1980년 13.9%에서 13.8%로 거의 일정하였으며 기업소득은 1980년 14.0%에서 2015년에는 24.1%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줄어든 가계소득이 모두 기업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가계부채는 계속 늘어나고 기업부채는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2015년에는 기업저축이 321.4조 원, 가계저축이 136조 원으로 가계저축의 2배반 정도에 이르게 되어 과거와 달리 기업이 투자하는 나라가 아니라 기업이 저축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보도들을 뒤적이다 보니 국민의 공복이라 자처하고 공익을 추구하며 그 임무를 수행하는, 그리고 한 때 박봉으로 대표되던, 공무원 집단들의 월평균 수입마저도 510만 원으로 노동자 월평균 소득 329만 원을 훨씬 웃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보자니, 우리나라는 현재 몇몇 국가 정책이 명목상으로 국익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많은 국민들에게는 무익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 겉으로는 국익 혹은 공익을 표방하지만 안으로는 국민 다수를 괴롭고 불행하게 만드는 국가가, 이른바 그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국가가 그리고 거기에서 특혜를 누리며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대기업과 같은 기득권 집단들이 이 사회, 이 지구상에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게 된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인간성을 개조하거나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깨닫기를 지켜볼 것인가, 혹은 간절히 바라고만 있을 것인가, 혹은 귀가 따갑도록 지껄이거나 적극적으로 따지고 나서서 강제할 것인가? 아니면 합의회의나 국민배심원제 같은 심의적 의사결정 방식 혹은 노사정협의회와 같은 제도를 통해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할 방안을 모색할 것인가? 일단 당장은 사람들이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동시에 대리인들의 인적 구성원들이 일부 긍정적으로 바뀌어 많은 것이 개조되리라고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권력이건 재벌권력이건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기득권의 확고한 체제는 막강한 힘을 동반한 나름대로의 생명력이나 관성을 가지고 있어 쉽게 개조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해결의 주체는 다수 국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투표의 형태건, 시민운동의 형태건, 촛불혁명 등과 같은 그 어떤 혁명의 형태건 가리지 않고 우리 삶의 질과 구조를 개조하는 일에 어떤 방식으로든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투표 날 하루만 잠시 주인행세를 하고 바로 다시 자발적 노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을 무한정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 : 김완구 민족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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