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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만물상] 당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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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장군급 부대장의 관사 당번병(공관병)으로 군 생활을 했던 한 중년의 경험담이다. 모시던 장군이 골프를 가는 날 새벽 골프채를 잘 닦아서 백에 넣어뒀다. 그런데 그만 '퍼터'를 빠뜨렸다. 골프장에 간 장군이 당번병에게 전화를 했다. "'빠따'(퍼터)가 왜 없어. 빠따 보내." 골프를 몰랐던 당번병은 '빠따'를 야구방망이로 알아듣고 한참을 헤맸다. 결국 운전병이 챙겨갔다.

▶입대 전 한 번도 난(蘭)을 키워본 적 없는 당번병은 20여개에 달하는 난 화분도 관리했다. 난이 철마다 꽃을 피우자 장군 부인은 "난 잘 키운다"고 칭찬했다. 이 당번병은 30여년 전 군 생활을 회상하면서 "비서, 청소 빨래 파출부, 요리사 역할을 모두 하는 게 당번병"이라고 했다. 온갖 잡일을 다 한다고 속칭 '따까리'라 불렸다. 80년대 초 여단장 사무실 당번병을 했던 50대 남성은 "군 생활 내내 휴가를 한 번도 못 갔다"고 했다. 여단장이 모든 업무 관련 서류 관리를 이 당번병에게 맡겼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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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번병은 군대에서 '꽃보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각종 훈련이나 사역 등에서 열외될 수 있고, 상관을 잘 만나면 편하게 군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바둑병, 과외병, 골프병, 영어병 등 당번병 종류도 많았다. 2012년 헌법재판관 청문회 때 '아들이 당번병으로 1년 동안 44일이나 휴가를 갔다'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군 인권센터가 26일 현역 육군 사단장이 당번병 등에게 가혹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사단장은 공관병에게 술상을 차려오라고 지시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목과 뺨을 때렸다고 한다. 당번병에게 자신의 대학원 과제를 위한 자료 조사도 시켰다. 전속 부관에게는 담배를 피울 때 재떨이를 들고 옆에 서게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당번병을 노예처럼 부린 것이다. 2005년에는 한 여단장이 멸치 선물 상자를 잘못 관리했다고 당번병을 폭행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육군 규정에 따르면 당번병은 장군급 지휘관이 지휘하는 독립 여단급 부대 이상에 배치된다. 정확한 명칭은 지휘관실 근무병(당번병), 공관 근무병(공관병)이다. 연대장급 이하 지휘관에게는 정식 편제가 돼 있지 않지만 통신병이나 운전병들이 그 역할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다. 규정상 당번병의 임무는 지휘관실 시설 관리, 상황실과의 연락 유지, 지휘관 업무 보좌, 기타 공식 지시 업무 등으로 돼 있다. 어디에도 '사적인 뒤치다꺼리'를 하라고 돼 있지 않다. 신성한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청춘들이다. 사적(私的)으로 이용하는 군 간부들이 적발되면 엄벌해야 한다. 당번병 제도 자체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녹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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