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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동준의 일본은 지금] 어른 위한 행사가 된 '10살 성인식'…"연출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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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1/2 성인식. 부모는 10살이 된 아이들을 축하하며, 아이들은 부모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지역과 학교에 따라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이 있는 5월에 진행된다.


매년 5월이면 일본 신문 생활면을 반드시 장식하는 기사가 있다. 바로 10살이 된 어린이들의 ‘1/2 성인식’에 관한 내용이다.

연례행사로 진행되는 1/2성인식에서 학생들은 부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여러 학생과 학부모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머니, 아버지의 날이 있는 5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학교는 이를 관례로 여겨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행사 진행을 위해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줘 ‘어른들을 위한 행사’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 방침에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아닌 선생님이 정해준 숙제에 초점을 맞추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해 편지를 작성한다.

행사의 공통적인 점은 ‘부모가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내용’이 빠짐 없이 담기는데,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적은 글을 일부 수정하고 교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편지를 읽어 ‘감동을 연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느낌을 학부형들에게 줬다.

아이들 고민해 쓴 편지를 어른들 입맛에 맞춰 고치고, 이를 행사장에 모인 부모와 학교 관계자들 앞에서 감동을 연출. 현장을 찾은 기자들은 학생들이 낭독하는 편지 중에서도 특히 감동적인 내용만을 엄선해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전국에 배포하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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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이날 행사를 위해 숙제를 낸다. 이에 학생들은 자기 생각보다 숙제에 초점을 맞추게 돼 문제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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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당에 학부모, 학교 관계자 내외 귀빈을 초청해 행사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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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는 기자도 참여해 학생들의 편지 중 일부를 지면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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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 마친 학생들에게 학교는 '1/2 성인증서'를 준다.


상황이 이렇자 부모들도 내켜 하지 않으며 쓴소리를 내고 있다.

27일 일본 아사히신문에는 이 같은 학교 행사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신문에 따르면 한 학부모는 “남편과 이혼 후 아이와 단둘이 생활하는데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받아든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난 왜 아빠가 없나’라는 말을 해 가슴 아팠다”며 “정작 중요한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은 온데간데없는 어른들의 행사”라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또 아동 임시보호소에서 생활하는 한 학생은 “부모님도 가족도 없어서 슬펐다”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운동장 구석에서 혼자 있었다”고 말했다.

사정상 손자를 키우는 노부부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가 ‘부모에 대한 감사 인사’여서 부모가 없는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했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아이들의 감정과 마음을 뒤로한 채 어른들 보기에 좋은 행사가 되어버린 2분의 1 성인식을 두고, 일부 학부모들은 학교에 의견을 제출하며 숙제가 아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만들어 가정의 행사로 변모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지금도 같은 문제를 되풀이 하며 연출된 감동 만들기에 힘 쏟고 있다.

어느새 어른들을 위한 소문난 잔치가 되어버린 아이들 성인식에 학생도 부모도 염증을 느끼는 지금. 이날의 취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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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로부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학부모.


한편 지적장애 부모와 그들의 자녀를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주제로 ‘부모에게 감사하기 힘든 아이들도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은 부모의 학대를 받은 아이가 학교에서 내준 1/2 성인식 숙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에 한 부모가정이나 부모가 없는 아이,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에 대한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라 사회와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동준 기자 blondie@segye.com

사진= 아사히신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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