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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범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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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6일)은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비명에 가신 지 68년째 되는 날이다. 선생은 안동 김씨 경순왕(敬順王)의 자손으로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말도 못할 개구쟁이였다. 부친의 엽전을 훔쳐 떡을 사먹으려다 들보에 매인 채 매를 맞기도 했다. 열두 살(1887년) 때 부친이 사랑에 서당을 열자 선생은 글을 배우는 게 너무나 기뻤다고 백범일지를 통해 당시를 회상했다.

선생은 과거에 낙방한 이후 동학에 입도했다.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동학 교리를 접하고는 “별세계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1894년 동학혁명 때 교구책임자인 접주(接主)로 활약했으나 패하고 물러난다. 한동안 청계동 안태훈에게 의탁하는데, 안태훈의 아들 안중근을 보고 “영기(英氣)가 넘친다”고 평했다. 그곳에서 스승 고능선을 만나 한학을 배우고 국사를 논했다.

이후 선생은 청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살해, 영어의 몸이 된다. 그는 옥중에서도 독서와 수감자 교육, 성악(聲樂)에 몰두했으니 참으로 대인배였다. 탈옥한 뒤 선생은 삼남지방을 돌아보고 1898년 공주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환속했다.

교육사업과 구국운동, 일제에 의한 투옥과 고문을 경험한 뒤 1915년, 4년 만에 출옥한 백범의 나이는 이미 불혹(不惑)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1919년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되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항저우, 충칭 등을 거치며 저항을 이어갔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창단해 ‘이봉창 동경의거’와 ‘윤봉길 홍구의거’를 주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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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

광복 후 선생은 정부자격으로 환국코자 했으나 미군정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또 광복 정국에서 조국의 분단을 온몸으로 막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선생은 1946년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모셨다.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가묘도 설치했다. 이듬해 원효로에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 후학과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1948년에는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도 효창공원에 모셨다. 그 또한 우익테러로 살해돼 1949년 효창공원에 묻히고 만다.

우리 구는 오는 7월 4일 효창원에서 의열사 제전을 연다. 의열사는 효창공원에 묻힌 7위 선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과거 임정 수립일(4월 13일)이나 임정 환국일(11월23일)에 맞춰 제례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올해부터는 백범 선생의 안장일(7월5일)에 즈음해 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또한 백범 김구 기념관 건립을 시작한 이래 항상 선생의 뜻을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유해를 효창공원 빈묘에 제대로 모시고, 이봉창 의사 기념관도 하루속히 건립하겠다.

오로지 겨레를 생각한 그분의 뜻을 온 국민이 함께 이어가길 바란다.

성장현 서울 용산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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