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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취업 앞에 자유는 없다 ‘토익 감옥’ 찾는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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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모 씨(30)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기숙형 학원’에서 지내고 있다. 늦깎이 수험생은 아니다. 이 씨는 취업준비생이다. 그가 머무는 학원은 토익시험만 준비하는 곳이다.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주 6일 강의실에서 토익만 공부하는 학원이다. 숙소가 없는 기숙형이라 잠은 근처 고시원에서 해결한다. 아침식사는 언제나 1500원짜리 김밥이다.

입시생도 아니고 서른 살 안팎의 나이에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받는 생활은 견디기 쉽지 않다. 하지만 ‘영포자(영어 포기자)’를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다. 이 씨는 “하루 종일 학원에 갇혀 있으면 움직이지 못해 속이 더부룩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목표 점수를 달성해 ‘토익 감옥’을 탈출하고 싶어 견디고 있다”고 말했다.

영어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토익성적은 기본 스펙으로 꼽힌다. 올해 7급 공무원 영어과목을 토익 성적 등으로 대체하면서 다시 토익 책을 찾는 청년도 나타나고 있다. 대학생들은 여름방학 때 성적을 올리기 위해 스케줄을 철저히 관리하는 기숙형 토익학원을 찾기도 한다.

19일 경기 지역 A학원의 한 강의실. 토익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필기 놓치지 마세요. 영어 약한 사람은 필기가 필수입니다.”

강사가 입을 뗄 때마다 학생들은 빠르게 받아 적었다. 대입 기숙학원처럼 어학원 이름이 쓰여 있는 티셔츠를 단체로 맞춰 입은 상태였다. A학원은 국내 최초의 기숙형 토익학원으로 알려져 있다. 기숙형 토익학원 수강료는 7주 과정에 110만 원 남짓. 학생들은 이곳에서 매일 15시간씩 스파르타식으로 토익을 공부한다.

7주 동안 연애는 물론이고 통성명도 금지된다. 서로의 이름을 몰라 학용품을 빌릴 땐 “1번님 수정테이프 좀 빌려 주세요”라고 출석번호를 부른다. 학원 측에 미리 알리지 않고 지각하거나 결석하면 부모에게 통보할 수도 있다. 또 학원에 나오지 않는 휴일이라도 술을 먹지 못하게 한다. 휴대전화 사용도 금지된다. 강의 전에 미리 휴대전화를 제출해야 한다. 갖고 있다가 적발되면 벌금 2만 원을 내야 한다. 대입 기숙학원 못지않게 까다롭지만 수강 신청이 줄을 잇는다.

일부 토익 교육업체의 과장광고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장광고를 한 온라인 업체 10곳에 시정명령을 내리고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여전히 비슷한 내용의 광고가 이뤄지고 있다.

B업체는 여름방학을 맞아 ‘토익 환급반’을 모집 중이다. 출석만 잘하면 ‘수강료를 100% 현금으로 환급한다’고 광고한다. C업체 역시 ‘수강료 0원, 수강료 100% 현금 환급’이라며 여름방학 단기 속성반을 모집하고 있다. 그러나 두 업체에서 수강료를 100% 환급받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까다로운 출석·수강 조건을 간신히 충족해도 세금을 뺀 수강료만 돌려준다. 업체들은 ‘제세공과금 본인 부담’이라는 문구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게 표시하고 있다. ‘꼼수’이지만 법적으로 제재가 불가능하다. 공정위 관계자는 “소비자가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채용 때 영어 점수보다 실무 능력을 중요하게 판단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많은 취업준비생은 ‘토익 점수라도 높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김정명 취업컨설턴트는 “기본적인 토익 점수를 넘어선 고득점은 큰 의미가 없다. 과도한 경쟁 탓에 사회 전체적으로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하경 whatsup@donga.com·이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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