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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충”“급식충” … 더 독한 막말로 관심 끌려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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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말로 상대 규정짓고 편 갈라

“마약과 같아 … 더 센말 악순환 불러”

당하는 이에겐 물리적 폭력과 같아

정치권선 ‘사이다 발언’ 가장해

지지층 결집 목적 막말 쏟아내

“상대 포용 못하는 정치적 자멸행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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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벤치 남자 하나가 김지영씨를 흘끔 보더니 일행에게 뭔가 말했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 하려고…. 김지영씨는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왈칵 쏟으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왔다.’(소설 『82년생 김지영』 중에서)

매일 육아에 찌들어 살다가 커피 한 잔 마시러 유모차를 끌고 나선 아기 엄마가 ‘맘충’으로 표현됐다는 소설의 한 부분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벌레’가 아닌 사람이 없다. 명절에 시댁에 먼저 들르자는 남편은 ‘한남(한국 남성)충’이다. 독서실 앞에 모여 재잘재잘 떠드는 중학생은 ‘급식충’,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할아버지는 ‘틀딱(틀니 딱딱)충’이다. 공격적인 작명은 일상으로 확대돼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으면 ‘부먹(부어 먹는)충’, 찍어 먹으면 ‘찍먹(찍어 먹는)충’으로 불린다.

‘OO충’은 공부벌레나 일벌레처럼 어떤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장난스럽게 놀리는 온라인 신조어였다. 하지만 이제는 오프라인까지 퍼져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관용구가 됐다. 거친 표현으로 상대방을 규정짓고 편을 가르는 듯한 수사법이 확산되고 있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19일 “막말이 ‘인정 투쟁’의 수단으로 동원됐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댓글 하나라도 눈길을 끌고 인정을 받으려면 자극적인 막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해석했다. 그는 “막말은 마약과 똑같아서 다음번에는 더 독한 막말을 해야 관심을 끌게 되는 악순환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의 막말은 그 파급력 때문에 더 심각한 악순환을 불러온다. 강동호 자유한국당 서울시당위원장은 지난 15일 당사 이전 개소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부를 향해 “아주 나쁜 놈, 깡패 같은 놈”이라고 발언해 각계에서 비난받았다. 홍준표 전 경남지사는 지난달 17일 페이스북에서 “박근혜 탄핵 때는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더니 감옥 가고 난 뒤 슬금슬금 기어 나와 당권이나 차지해 보려고 설치기 시작했다”며 한국당 친박계를 ‘OO충’도 아닌 진짜 ‘벌레’에 비유했다.

인종·종교·성 등 소수자 괴롭히기 많아

미국에서도 막말의 확산은 우려의 대상이다. 제러미 월드론 뉴욕대 로스쿨 교수는 2012년 쓴 그의 저서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에서 혐오표현의 확장성을 지적했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혼자가 아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개인의 혐오감을 그룹 차원으로 키우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수의 인종·종교·성·민족·성적 정체성을 싸잡아 비난해 소수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도록 사회환경을 훼손시킨다는 게 제러미 교수의 분석이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막말 덕을 톡톡히 봤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법 이민자를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 도중 자신에게 반대하는 시위대를 향해 “너네 멕시코에서 왔어? 멕시코에서 왔냐고. 응?”이라고 따져 묻는가 하면 상대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을 향해 “제 남편도 만족을 못 시키면서 미국을 만족시키겠다고?”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민자·여성에 대한 트럼프의 혐오발언이 불황과 소수인종의 증가세로 박탈감을 느끼는 저소득층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결집시켰다는 게 미 정치권의 분석 중 하나다.

정치권에서 나타나는 막말현상에 대해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막말의 대상이 돼 당하는 누군가에게는 물리적 폭력과 같은 수준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사회의 가장 공적 집단인 정치권에서 아무렇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이다 발언’을 가장한 막말을 쏟아내지만 결국 상대편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정치인으로선 자멸적 행위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맘충 : 아이 키우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 “저런 맘충들은 백화점에 안 오면 좋겠다”는 식으로 쓰인다.

● 급식충 : 중·고교생을 비하하는 말. “급식충들이 접속을 많이 해 게임 서버가 느려졌다”는 식으로 쓰인다.


홍상지·이현 기자 hongsam@joongang.co.kr

홍상지.이현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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