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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이굴기의 꽃산 꽃글]돌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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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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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하고 연애하듯 찰떡같이 착 달라붙은 해안길을 달리다가 아담한 마을로 내려서니 어느 건물 옥상에 물건중학교라는 간판이 보였다. 물건항을 목적지로 해서 찾아왔으니 묻지 않아도 여기는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임이 틀림없겠다. 물건리라서 물건중학교이겠지만 특이한 이름이기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불러보았다. 물건중학교. 처음 부임해 온 선생님이, 너희들 나중에 세상의 물건이 되어야 한데이, 농담도 해보겠지만 실은 물건은 지세가 물(勿)자 혹은 건(巾)자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아무리 파도가 몸살을 하지만 물건항에도 늦은 오후는 찾아오는 법이다. ‘2006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물건방조어부림’에는 풍채 좋은 나무들이 어울려 산다. 몽돌 해안을 지나 바위들의 동네로 나아갔다. 바다에서는 한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고, 가까운 해변에서는 따가운 햇살을 피하느라 수건으로 온통 얼굴을 가린 아주머니가 우럭조개를 캐고 있었다.

인기척을 듣고 뿔뿔이 달아나는 바닷게, 잔돌에 철석같이 들러붙은 굴과 따개비를 보면서 어느 바위에 이르렀다. 햇빛에 몸을 달군 바위의 등허리가 군불 땐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바위마다 어김없이 헤매는 개미 한 마리. 개미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길 없는 바위를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갈매기 조나단처럼 멀리 가는 개미에게 내 마음의 일단을 실어 보내려는데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짭조름한 소금기가 자욱한 이곳에서 정갈한 티를 간직한 나무, 거센 바람의 눈치를 보느라 슬기롭게 납작 엎드린 나무. 돌가시나무였다.

흥건해진 마음으로 물건리에서 돌아와 물건들에 둘러싸인 일상의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KBS 스페셜 <자연의 타임캡슐>을 보다가 제주의 어느 해녀가 숨비소리와 함께 내뱉는 말이 나의 귓전에 닿았다. “물건은 용왕이 주는 것. 저승에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쓴다.” 늦은 밤 컴컴한 밤중의 방에서 홀로 저 문장을 들었을 때, 비몽사몽간에 바다와 육지의 접면에서 그 어떤 경계를 꿰매는 바느질 자국처럼 가시가 발달한 물건항의 돌가시나무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돌가시나무, 장미과의 반상록성 소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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