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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직설]네 진짜 얼굴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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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아도니스를 닮은 청년 도리언이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대신 그의 초상화가 늙고 추악해진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육체와 죄 많은 영혼의 분리, 이 상상적 소망은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이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같은 작품을 통해 거듭되었던 인간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이는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어떤 실제들이 아닐까. 가령 우리들이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다양한 아바타나 이모티콘, 아이디, 별칭 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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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영화, 커피, 애완동물 카페 그리고 페북과 단톡방들. 그곳에서 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스트였다가 남아선호사상에 찌든 맘충이 될 수도 있고 인권 옹호자였다가 외국인 혐오자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의 인격은 페르소나(persona·가면)라는 어원에서 알 수 있듯 현실에서도 다양한 가면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엄마, 선생, 친구, 딸 등의 인격체들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체성의 변전은 가상공간만큼 가변적일 수 없다.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의 자아’는 실제로 내가 수행하는 실제적 자아의 연장이 아니라, 억압되거나 잠재된 충동이 실현된 판타지로 비약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상에서 실현된 가상은 억압된 ‘하이드’라는 어두운 충동이기 쉽고, 따라서 무법천지의 폭력이 자행되기 쉽다.

2017년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도선우의 <저스티스맨>은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폭력성을 자못 신랄하게 다룬다. 평범한 한 남자가 어느 날 밤 대취하여 길거리에 설사와 구토를 하는 장면을 누군가 찍어 인터넷상에 올리고 신분이 노출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되자 문제의 ‘설사남’이 복수극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무법천지의 디지털 세계에 ‘저스티스맨’을 자처하는 그는 ‘여고생의 첫 경험’을 동영상으로 유포하여 자살로 몰고 간 이들, 사이버 카페의 권력자, 무지한 누리꾼들을 응징하며 활약을 펼친다. 소설은 저스티스맨의 ‘살인’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지만 이러한 봉합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저스티스맨’을 응원하거나 두려워하는 누리꾼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이모티콘의 현란한 제스처와 미소, 그리고 괴물의 언어, 그 가상의 소통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려지는 우리의 진짜 얼굴들이 문제인 것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혁명으로 우리는 유사 이래 가장 민주적이고 다양한 네트워크와 채널들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이 반드시 우리를 진실과 바람직한 사회적 합의체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조립이 가능한 각자의 채널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사실로 만들고 그 사실의 판타지 속에서 각각 단절된 믿음의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공론장이 깨져버린 각자의 채널 속에서 파편적 사실을 소비하는 인터넷 문화와 사이버 범죄를 두고 도선우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라는 게 공존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흔히 결과만을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하기 쉬우며 그러한 집단오류가 또 다른 이차적인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얘기”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현대인의 소통을 벤야민은 ‘체험(Erlebnis)’이라고 했는데, 이는 집합적 과거와 기억 속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경험(Erfahrung)’과는 다른 기계적 쇼크라고 지적했다.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는 이러한 불가해와 익명성과 관련이 깊다. 미스터리 서사장르는 현대 대중문화의 주류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도시가 지닌 익명성 때문이다. 과거 전통 사회의 마을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사건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지낼 수 있다. 매일 엄지족이 되어 끊임없이 이모티콘과 문자를 날리지만, 실상은 만난 적도 없고, 만났어도 실제의 그와는 무관한 이들, 또 실제의 나와는 분리된 캐릭터들의 소란에 불과할 수 있다. 인천 여아 살해사건을 심층 취재한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전문가의 말대로, 사이버상의 폭력과 잔혹성을 실재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나와 그것’의 환각을, ‘나와 너’의 실체로 돌려놓아야 한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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