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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한기호의 다독다독]‘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과 촛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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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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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태와 나는 남북 교류가 진전되려면 누군가가 직접 방북해서 북측과 협의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국이 우리의 제의를 허용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저지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로서도 방북의 중요한 목적은 문화 교류의 전령사를 해내겠다는 점에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객관적인 ‘북한방문기’를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앞섰다. 국가보안법상의 처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정치인이 아닌 작가의 처벌은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죄목이지만 불고지죄란 국가보안법을 위반할 것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으면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조직이든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항목이었다. 이는 내가 개인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한 민예총과 작가회의가 조직적인 탄압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향신문

황석영은 자전 <수인>(문학동네)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금기를 깨고 방북을 결행한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강고한 분단체제에 충격을 던진 그는 방북 후 4년의 망명을 거쳐 귀국 후에 5년간의 엄혹한 수인생활을 겪어냈습니다. 저는 이 감동적인 자전을 읽으면서 제2, 제3의 황석영은 계속 등장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전은 한 개인의 기록으로만 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엄혹한 세월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민족 모두가 분단이라는 체제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도 때문에 얼마나 핍박된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다시 절감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좌우파 투쟁과 한국전쟁을 통해서 수립된 대한민국은 ‘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며 출발했다. 우리의 국가는 정치적 상대를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증오와 학살의 정치 속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이런 국가에서 권력은 ‘죽이거나 살게 내버려둠’이라는 이항적 대립을 통해서 작동했다. 사찰하고 조작해서라도 간첩으로 만들어 죽이거나 가두어버리는 권력, 죽이고자 하면 죽일 수 있는 권력, 이것이 분단체제 아래서의 권력의 기본 운용방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이란 그저 국가권력이 살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된다. 이런 죽이는 권력의 힘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런 죽이는 권력의 가깝고 끔찍한 경험이 바로 1980년 광주가 겪은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였다.”

사회학자 김종엽은 <분단체제와 87년체제>(창비)에서 우리 체제의 한계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또한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었습니다. 김종엽은 “TV로 국가의 부작위 아래 수백명의 사람이 안타깝게 죽어가는 장면이 며칠 동안 중계되었을 때,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은 무너져내렸다”고 말합니다. “공공서비스를 약탈적 수입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리는 전현직 관료의 부패 네트워크 혹은 이들과 자본 사이의 결탁 속에서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 혹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은 “국민을 ‘미생(未生)’의 존재로 내몰고 내부로부터 난민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항의하고 도전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고 탄압”했습니다.

이런 이항대립의 견고한 벽을 깨려고 나선 이들은 1970년대 이래 출판을 포함한 문화계 종사자들이었습니다. 황석영 자전에서는 그런 활약상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는 늘 주류의 견고한 벽을 깨려는 시도를 하게 마련입니다. 수많은 금서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최근에는 그런 노력이 크게 줄어든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오로지 ‘팔리는 책’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대학에서마저 아카데미즘이 실종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이 실종된 촛불혁명은 이항대립을 깨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는 ‘서브컬처 혁명’이었습니다. 가짜 아카데미즘과 사이비 언론이 판치는 사이에 주변부로 내몰리던 사람들이 연대해 이룩한 혁명이 아닌가요?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경유하며 고착된 저성장, 비정규직화와 저임금, 사회경제적 강자들이 저지르는 여러 종류의 ‘갑질’, 그리고 빈곤 문제(노령층에 특히 심각한)가 너무 심해져서 ‘헬조선’이라는 끔찍한 신조어가 생겼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풍자하는 ‘수저계급론’까지 등장”(김종엽)한 현실에 분노한 대중이 이룩해낸 혁명이었습니다.

촛불혁명이 진정한 혁명이 되게 하려면 ‘블랙리스트’로 문화를 핍박하던 기구부터 정비해야 마땅합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독서’에서마저 이념적 족쇄를 채우는 권력의 주구 노릇만 했습니다. 비판적 저자의 강연을 막고, 지극히 상식적인 책마저 이념의 잣대로 읽지 못하게 만드는 데 앞장섰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런 단체의 뒤에 숨어서 ‘닭모이’에 불과한 알량한 예산을 던져주면서 이항대립의 구조를 견고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런 단체를 차라리 없애는 것이 출판문화 증진에 유리할 것이라고 봅니다.

도종환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정농단 및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가 끝나면 백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백서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가 갖는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하수인 노릇만 했던 자들부터 하루빨리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항대립을 깨는 항구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 문화에서만큼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제도 말입니다. 그래야만 타자를 배려하는 다양한 문화가 저절로 진흥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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