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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스물세살 기형도가 술값 내준 여성에게 건넨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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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방위병 시절 문학회 활동하며 쓴 작품 공개

연합뉴스

[박인옥 시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당신의 두 눈에/ 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 밤이면/ 그대여, 그것은/ 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 당신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 아, 어쩌면 당신은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손을 내미십시오/ 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 손을 뻗치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요절시인 기형도(1960∼1989)가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3년 전인 1982년에 쓴 시다.

대학을 휴학하고 방위병(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하던 기형도는 근무지 안양의 문학모임 수리문학회에서 활동했고, 술자리에서 여자 회원들이 술값을 내면 그 보답으로 시를 써주었다고 한다.

기형도가 한국 나이로 스물세살 때 육필로 써서 건넨 이 시는 박인옥 시인이 최근 수리문학회 활동을 정리하던 중 한 여성 회원으로부터 건네받았다.

기형도는 같은 여성에게 두 편의 시를 더 선물했다. 세 편 모두 '당신'으로 시작하는 전형적 사랑시다.

"당신에게/ 오늘 이 쓸쓸한 밤/ 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 있읍니까/ 하늘 언저리마다/ 낮게 낮게 눈이 꽂히고/ 당신의 찻잔은/ 이미 어둠으로 차갑게 식어 있읍니다/ 그대여,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통나무 문을 여십시오/ (…)"

"당신이/ 외투깃을 올릴 때/ 무엇이 당신을/ 차갑게 하는지 두렵게 하는지/ 알고 계세요?/ 풀잎은 모두 대지를 향해/ 지친 허리를 누이는 밤/ (…)/ 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 튀어올라 물보라치는/ 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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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연합뉴스 자료사진]



시의 존재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작가 성우제씨가 세 작품 중 한 편을 최근 인터넷 블로그에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성씨는 기형도의 대학 동문으로 절친했던 소설가 성석제의 동생이다.

성씨는 "서울이 바짝 긴장한 채 서로에게 칼질하는 분위기였다면, 안양은 마음놓고 편안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고향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라며 "형도 형의 시는 수리문학회 시절에 일취월장한다. 그때가 아마추어에서 프로페셔널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썼다.

박인옥 시인은 "당시 시를 받은 회원은 기형도보다 한 살 어린 문학소녀였고 지금은 평범한 주부"라며 "광명에 곧 개관할 기형도문학관에 시를 기증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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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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