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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퇴직연금 150조 시대]③ "차라리 땅 사고 주식 사지"…낮은 수익률에 외면받는 퇴직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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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임원 양지훈 씨(가명, 48세)는 자신의 DC형 퇴직연금에 늘 불만을 품어왔다. 수익률 성적이 영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익률을 높이려면 적극적으로 투자도 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양씨가 보기에 막상 금융사들이 내놓은 상품들은 못 미더운 경우가 많았다. 또 이것 저것 알아봐야 할 게 너무 많아 귀찮아서 방치하기 일쑤였다. 매번 시장 수익률에도 못미치는 성적표를 들고 있자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당뇨와 치매가 심해져 요양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양씨는 부양가족의 장기 요양이 퇴직연금 중도인출의 사유가 된다는 점을 알게 됐다. 양씨는 회사에 어머니의 요양 사실을 알리고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했다.

한국 퇴직연금 시장은 빠르게 그 규모를 키우고 있지만, 저조한 수익률 탓에 가입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 대다수가 수급 보장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낮은 수익률로 큰 효용을 못 느끼고 있다.

컨설팅 업체 머서(MERCER)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을 가입한 업체 중 488개 회사에서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퇴직연금제도가 직면한 과제 1위로 ‘저조한 투자수익률’이 꼽혔다.

이 때문에 기업-근로자-퇴직연금운용사의 3개 운용 주체가 함께 시너지를 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환경과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시장 수익률도 못 따라가는 퇴직연금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낮은 운용수익률은 근로자의 안정적인 노후소득 마련의 장애요인으로 지적된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퇴직연금시장의 평균 수익률은 1.8%에 불과했다. 사실상 은행 적금 이자율과 다를 바 없다. 지난해 코스피지수 상승률인 3.32%보다 못 미친다. 또 지난해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상승률인 4.22%(부동산114 기준)보다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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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년 간 한국 퇴직연금 적립금의 매년 평균 운용 수익률/머서(MERCER) 제공



3층 연금의 1단계인 국민연금의 수익률에도 훨씬 못 미친다. 국민연금은 1988년 기금 운용이 시작된 이후 연평균 5.9%의 누적 수익률을 거뒀다. 지난해 수익률은 4.7%다. 국민연금 적립금은 다양한 자산으로 구성돼있다. 올해 1월 말 기준으로 전체 561조원의 적립금 중 50.2%는 국내 채권에, 4.2%는 해외채권에 투자했다. 그리고 약 34.1%는 국내·외 주식에, 11.2%는 대체투자 형식으로 운용 중이다.

해외 선진국의 운용실적과 비교해도 국내 퇴직연금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2015년 기준으로 호주 퇴직연금의 5년 간 연평균 수익률은 9.5%다. 같은 기간 한국의 3%보다 3배 높은 수준이다. 미국의 퇴직연금에 대한 기대수익률은 연 평균 7%다.

◆ 인사팀 김 과장이 내 퇴직연금을 관리하고 있다고?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낮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하는 주체의 관심과 책임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DB(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의 경우 회사가 운영의 주체이지만, 대부분 기업에서는 별도의 운영 부서를 두고 있지 않고 인사과나 재무과에서 관리한다. 만약 손실이 나면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 특정 부서에 지워지기 때문에 이들의 가장 중요한 미션은 안정적 운영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원리금보장상품에 퇴직연금을 투자한다. 저금리·저성장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업체들은 원리금보장형 상품과 만기 1년 이하 단기성 상품 중심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우리나라 퇴직연금에서 DB형의 경우 원리금보장형이 98%를, DC형에서는 80%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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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제도별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한도 /금융감독원



류건식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수익률이 저조한 상황에서 인사나 재무팀 직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운용 상품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일정한 원칙과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그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관련된 관행이나 제도가 자리잡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가입자가 직접 자산을 운용할 수 있는 DC형이나 IRP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가입자 역시 투자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 적립금을 방치해 둔다. 머서코리아에 따르면 DC형 퇴직연금 적립금에 대해 포트폴리오를 한 번이라도 변경한 근로자는 10명 중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 퇴직연금 방치하면 회사도 근로자도 운용사도 모두 손해

수익률이 개선된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매년 임금상승률을 반영해 금융사에 예탁해야 하는 금액에 대한 부담이 덜해지고, 여기서 발생하는 추가 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 근로자의 경우 DB형 가입자라면 퇴직할 때 회사가 돈이 없어서 못주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고 안정적으로 수급권을 확보할 수 있다. DC형 가입자는 노후 자금을 불릴 수 있어 좋다. 운용사 역시 수익을 내면 그만큼 인센티브를 가져갈 수 있다.

퇴직연금 시장 플레이어들이 윈-윈(win-win)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퇴직연금의 사후관리 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황규만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DB형은 투자원칙보고서(IPS)와 같은 의사결정 시스템을 통해 담당자가 전문적이고 성실히 운용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며 “더불어 경영진도 참여하는 등 위원회를 구성해 투명한 기구를 만들고 책임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2명의 의원은 DB형 IPS를 의무화 하는 내용을 담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근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법안에 따르면 ‘적립금 운용위원회’와 관련된 조항을 신설하는 것이다. 법안에 따르면 기업은 위원회를 신설해야 하고, 매년 1회 이상 구체적인 계획서를 만들어 심의하고 퇴직연금을 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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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S의 기능/금융투자협회 제공



DC형의 경우 가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운용 지식을 갖추기 위한 교육강화가 요구된다. 류건식 연구위원은 “DC형은 퇴직연금 가입자 스스로 투자상품을 선택하고 운용하기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다”며 “현재 우리나라는 근퇴법에서 가입자 교육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대부분 형식적 교육에 그치고 해외 선진국에 비해 미흡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일본은 가입자에 대한 교육이 퇴직연금 투자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교육 강화를 추진했다”며 “가입자 교육 전문가(DC Planner, DC Advisor)를 양성해서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기업별로 모범사례를 발굴해 전파했다”고 설명했다.

◆ 능력이 돼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적어…“상품의 다양성 확보돼야”

사후 관리를 통한 운용능력 강화와 함께 다양성 확보도 필수적인 개선점으로 지적된다.

황규만 부사장은 “DC형의 경우 원리금이 보장되지 않는 펀드상품이 약 18%를 차지하는데 선택할 수 있는 상품들이 제한적이고 대부분 3~4개 상품에 몰려있다”며 “예를 들어 해외 주식이 좋다 해도 마땅히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라 다양성 결여가 수익률의 또 다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류건식 연구위원도 “미국이나 일본, 호주 등 해외 선진국들은 생애주기에 맞춰 자산을 배분하는 펀드나 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 다양한 상품들이 개발되고 있다”며 “반면 한국은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참 모자란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들어 각광받고 있는 TDF(타깃 데이트 펀드·Target Date Fund)가 대표적인 예다. TDF는 생애주기에 맞춰 사회 초년일 때는 위험자산 위주로 투자를 해서 수익률을 끌어올리고 퇴직이 가까워지면 안전자산의 비중을 늘리며 연착륙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TDF가 보편적인 퇴직연금 상품이 됐다. 미국에서는 TDF 시장 규모가 1000조원을 돌파했다. 한국에서는 과거 2011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출시한 바 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현재는 자산운용사들이 앞다퉈 TDF를 선보이는 추세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이전 TDF를 보완하고 새로운 상품도 개발해 10종을 출시했다.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도 각각 ‘삼성한국형TDF’, ‘한국투자TDF알아서’ 등 7종씩 내놨다. 이외에도 주요 자산운용사들이 TDF 출시를 계획 중에 있다.

김우창 카이스트 교수(금융공학)는 “미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TDF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며 “현재는 각 개인 성향에 따른 다양한 TDF 상품들이 출시됐고 미국 연금시장의 대부분이 TDF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제 해외는 TDF도 다양성의 한계를 보이며 로보어드바이저를 활용한 퇴직연금 관리가 트렌드”라며 “개인들의 수명이 늘어나고 소비성향도 다양화되며 단순히 상품의 다양성을 넘어 개별 맞춤형 관리로 진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부진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현익 기자(beepark@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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