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19 (화)

판잣집 사라진 오늘… 남산 자락 이야기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해방촌 '책방 산책'

서울 남산 자락의 해방촌은 맛과 멋의 유행에 민감한 이들에겐 사실 익숙한 이름이다. 이태원 중심가의 번잡함에 싫증 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이곳은 녹사평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경리단길과 함께 이태원의 새 명소로 떠올랐다. 외국인이 많은 동네 특유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조선일보

해방촌 중심가에 해당하는 신흥로는 다국적 맛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 어두워지면 더 활기가 도는 거리를 서울타워가 내려다본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전혀 새로운 모습이 보인다. 해방촌은 이미 알려진 대로 서울의 작은 지구촌일 뿐 아니라 개성 있는 책방이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서울시가 지난 2월 서울의 동네 책방들을 찾아가는 산책길 11곳을 모아 펴낸 안내서 '책방산책'에도 해방촌이 소개됐다. 대형 서점에서 만나기 어려운 작은 책들과 이야기들이 해방촌 골목길에 있다.

독립출판물, 외국 서적… 개성 강한 책과 책방들

조선일보

향 냄새가 은은하게 감도는 독립출판물 책방 ‘별책부록’ 내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방촌 책방 산책은 용산2가동 주민센터 앞 '해방촌 오거리'에서 시작된다. 걸어서 5분쯤이면 닿는 곳에 '별책부록'이라는 책방이 있다. '별책부록이 이쯤 어디일 텐데….' 지도를 들여다보며 걷다가 별이 그려진 작은 간판이 보이면 맞게 찾아온 것이다. 개인이 펴낸 책이나 소규모 출판사의 독립 출판물을 주로 다루고 해외 도서들도 있다. 영화를 전공한 주인이 운영하는 책방답게 '캐스트(CAST)'라는 영화 비평 잡지도 직접 발간한다. 2007년 창간해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 소문이 났던 잡지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의 후신(後身)이다. 작년에 창간호와 제2호를 냈고 지금은 3호를 준비 중이다.

조선일보

비탈길에 자리 잡은 책방 ‘스토리지북앤필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2년 충무로에 처음 문을 열었던 '스토리지북앤필름'도 2013년 해방촌으로 옮겨왔다. 1층에 가게를 낼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이사했다고 한다. 역시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국내외 독립 출판물을 다룬다. 이곳에서는 책 만들기 워크숍도 진행한다.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도록 책의 기획부터 제본까지 다양한 분야를 강의한다. 책방엔 그렇게 만들어진 책들도 진열돼 팔린다. 해방촌의 책방에선 책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느슨해진다.

조선일보

방송인 노홍철이 운영하는 ‘철든책방’. 문 여는 날짜를 소셜 미디어로 알린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방촌 신흥시장 안에는 방송인 노홍철이 운영하는 '철든책방'도 있다. 책을 파는 서점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책을 같이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지트에 가까운 곳이다. 직원을 두지 않고 노씨가 직접 운영하기 때문에 그의 스케줄이 비는 날에 부정기적으로 연다.

이왕 책방을 둘러보러 나선 길, 녹사평대로를 건너 이태원 우체국까지 가면 옆에 '포린 북스토어'가 있다. 1973년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외국 서적 전문점이다.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론리플래닛' 여행 책부터 학술·문학 서적, 어린이 그림책까지 빼곡하다. 전산화된 시스템은 없지만 주인 최기웅(74)씨는 "오랜 시간 운영하다 보니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금방 찾는 노하우가 생겼다"며 "책장도 제재소에서 나무를 켜다 직접 짰다"고 했다. 최씨가 서점을 찾아온 고객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을 꺼내 보여준다. 손님들의 출신 국가를 보면 가장 많은 건 역시 미국이지만 세네갈, 케냐, 루마니아, 브루나이까지 다양하다.

실향민의 판자촌에서 젊은이의 거리로

조선일보

산꼭대기까지 온통 뒤덮은 집들 사이로 실핏줄 같은 길이 이어진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방촌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8·15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다. 서울에 모여든 실향민들이 남산의 산비탈에 만든 판잣집이 모여 해방촌이 됐다. 전후의 사회상을 그린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의 배경이 이곳이다. 주인공 송철호는 치매 노모, 만삭의 아내, 상이군인 남동생, '양공주' 여동생을 부양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산등성이를 악착스리 깎아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이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일보

판잣집이 사라진 오늘의 해방촌은 젊은이들의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신흥로엔 베트남식·모로코식 샌드위치집, 미국식 중국요릿집, 프랑스 빵집 같은 다국적 맛집들이 늘어서 있다. 길가에선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신흥시장 깊숙한 곳에까지 새로운 가게들이 계속 생겨나는 중이다. '카페 1-88'도 그중 하나. '1인 낮술자 대환영'이라고 쓴 간판이 발길을 잡아끈다. 과연 요즘 인기 좋은 크래프트 맥주(소규모 양조장 맥주)부터 크래커와 크림치즈(4000원), 견과류(5000원)같이 혼자 간단히 먹기 좋은 안주까지 갖췄다. 이런 가게가 있으리라고 도무지 예상하기 어려운 좁은 모퉁이에서 의외의 즐거움과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해방촌이다.

[채민기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