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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열기구 띄우고, 그리스 신전 세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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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스케일 커지는 럭셔리 브랜드 크루즈 컬렉션

중앙일보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산맥의 사막에서 원시(Sauvage)와 야생(wild)을 주제로 선보인 디올 2018 크루즈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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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크루즈 여행이 한창이다. 루이뷔통은 일본 교토, 디올은 미국 로스엔젤레스(LA)에 이미 닻을 내렸고, 구찌는 5월 29일 이탈리아 피렌체에 상륙한다.

사막으로 떠나는 런웨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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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샤넬 2018 크루즈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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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패션 브랜드는 대개 일 년에 두 번 정규 컬렉션으로 신제품을 내놓는다. 2월과 9월 패션 4대인 도시 파리·밀라노·뉴욕·런던에서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5월엔 4대 도시 말고 세계 곳곳에서 신제품을 공개한다. 크루즈 컬렉션이라 불리는 이벤트에서다. 정규 컬렉션 못지않게 규모가 크고 내놓는 신제품 수도 비슷하다. 늘 열리던 도시에서 다른 브랜드와 함께 하는 게 아니라 주목도도 높다.

루이뷔통은 모나코와 미국 팜스프링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이어 올해는 일본 교토의 미호 박물관에서 5월 14일 2018 리조트 컬렉션을 발표했다. 샤넬은 과거 싱가포르·두바이·서울·하바나에 이어 올해는 5월 3일 본거지인 파리 그랑팔레로 귀환했다. 원래 목적지는 그리스였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라거펠트는 그리스의 역사적인 장소를 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파리 그랑팔레 안에 그리스 신전을 세웠다.

구찌는 2016년 런던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이어 올해 피렌체 팔라티나 미술관을 택했다. 구찌 역시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가하면 5월 11일 디올의 2018 크루즈 쇼는 미국 LA 근교 산타모니카에서 열렸다. 광활한 사막 위에 세워진 영화 세트 같은 런웨이와 공중에 뜬 거대한 열기구가 장관을 이뤘다.

크루즈 컬렉션에 웬 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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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미호 박물관에서 열린 루이뷔통 2018 크루즈 컬렉션. 미호 박물관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건축한 I.M. 페이가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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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 컬렉션은 점차 확대되는 모양새다. 프라다는 2017년 처음으로 여성복만 독립적으로 크루즈 컬렉션을 발표했다. 지금까지는 남성 봄·여름 컬렉션에 섞어 커플룩처럼 일부만 제안해왔지만, 5월 7일 밀라노 폰다지아노 프라다 전시관에서는 우아한 에슬레저(athleisure)룩을 주제로 한 여성복 크루즈 컬렉션을 최초로 선보였다.

크루즈 컬렉션은 리조트 컬렉션이라고도 불린다. 여행 떠날 때 입는 옷을 선보인다는 말이다. 1980년대 지방시·샤넬·랄프로렌 등이 겨울이면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북반구 부유층을 타깃으로 의상을 선보였던 데서 출발했다. 코트를 입어야하는 한겨울에 제안하는 수영복이라니? 당시만 해도 일반 소비자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들만의 잔치였다. 당연히 규모도 작았다.

지금은 다르다. 일부 부유층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여가와 휴양을 즐기게 된 덕분에 고객층이 넓어지면서 리조트 룩의 개념도 더 넓어졌다.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리조트 룩이지만 꼭 여행 갈 때 입을 필요는 없다”며 “공간 개념(여행지)이 아니라 개인이 패션을 통해 향유하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크루즈 컬렉션 의상을 보면 각 잡힌 재킷이나 스팽글 소재의 스커트 등 여행과 상관없어 보이는 룩이 많다.

실제로 각 브랜드는 크루즈 컬렉션을 여행 시즌 제품을 선보이는 자리로만 여기지 않는다. 규모가 큰 럭셔리 브랜드들이 정규 시즌 두 번과 11월 프리폴(pre-fall) 컬렉션 뿐 아니라 5월이면 크루즈 컬렉션을 여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크루즈 컬렉션은 5월 공개 후 그해 10월부터 다음해 초봄까지 매장에 풀린다. 3월 봄, 9월 가을 정규 컬렉션 옷이 풀리는 나머지 기간, 즉 가장 오랫동안 팔린다는 얘기다. 4월부터 8월까지는 프리폴(pre-fall) 컬렉션이 매장에 풀린다.

프라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우치아 프라다는 5월 7일 크루즈 쇼를 마친 후 WWD와의 인터뷰에서 “단지 크루즈 컬렉션으로 칭하고 싶지 않다”며 “패션쇼 초대장에 아무것도 써 넣고 싶지 않았지만 혼동이 있을 것 같아 일단 ‘리조트’를 앞에 붙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역 넓히는 크루즈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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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뷔통의 피날레 무대를 장식한 배우 배두나.


자연스레 규모도 확대됐다. 몇몇 브랜드는 정규 시즌 못지않은 화려한 패션쇼를 열고, 먼 곳까지 유명인들을 초청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실시간 프로모션을 한다.

크루즈 컬렉션에 이처럼 공을 들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라·H&M 등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15분마다 신제품을 선보이고 있는 와중에 럭셔리 브랜드가 1년에 딱 두 번의 정규 시즌 컬렉션으로만는 수익을 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매 시즌 쇼핑을 하고 싶어하는 충성 고객들이 있기에 컬렉션은 고스란히 수익 증가로 이어진다. 뉴욕타임스는 “전통적인 봄·가을 컬렉션보다 크루즈 컬렉션 등 간절기 아이템이 디자이너 의류 매출의 60~80%를 차지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힘 뺀 의상, 대중 속으로


리조트 컬렉션과 프리폴 컬렉션은 끼인 계절에 내놓는 옷답게 가볍고 입기 편하다. 디자이너들도 한결 힘을 빼고 만든다. 2월과 9월 정규 시즌에서 치열하게 각 브랜드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각을 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규시즌에선 기성복인데도 때론 난해해 보일만큼 예술성을 강조하지만 크루즈 컬렉션엔 비교적 편안한 실루엣의 니트와 재킷, 티셔츠와 샌들 등 일상복으로 활용하기 좋을만한 의상들로 채운다. 한층 더 상업적이라는 얘기다.

크루즈 컬렉션의 흥행은 계절에 구애받지 않는 최근 패션 시장의 흐름과도 통한다. 봄·여름 시즌에 퍼(fur)의상을 발표하고, 가을·겨울 시즌에 보디 수트를 선보이는 요즘이다. 전 세계적으로 지역·계절 등에 구애받지 않는 왕성한 패션 소비자들이 포진해 있는 지금 크루즈 컬렉션에서 선보이는 간절기 룩이야말로 이상적인 스타일일 지도 모른다.

패션 편집 매장 분더샵의 헤드 바이어 조준우 과장은 “크루즈 컬렉션은 컨셉트가 어렵지 않고 일상복으로 매치하기 좋아 반응이 좋다”며 “지난해 가을에 나온 구찌 2017 리조트 컬렉션 중 반다나(머리띠)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간절기 제품들을 더 확대해 매장에 많이 들여놓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2016년 11월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에는 샤넬의 크루즈 컬렉션 슈즈 팝업 매장이 따로 들어서기도 했다. 그해 5월 쿠바에서 선보인 리조트 컬렉션 슈즈들만 모아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럭셔리 브랜드의 고민


럭셔리 브랜드들은 크루즈 컬렉션을 떠오르는 신흥 패션 시장을 공략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한다. 콧대 높은 패션 하우스들이 미국과 유럽이라는 전통적 공간을 떠나 브라질·한국·동남아 등 새롭게 떠오르는 소비 시장에 원정 패션쇼의 닻을 내리는 이유다.

매달 신선한 패션 콘텐트를 요구하는 디지털 시대에 이슈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크루즈 컬렉션은 필요하다. 랑방 디자이너였던 알버 엘바즈는 2015년 패션그룹인터내셔널(FGI) 연설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는 컬렉션 시스템이 디자이너들의 독창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쓴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 역시 크루즈 컬렉션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크루즈 컬렉션의 확대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과거 패션쇼가 끝나고 6개월 후에나 구입할 수 있었던 옷을 이젠 쇼 직후 구입할 수 있는 시대 아닌가. 2016년 9월 버버리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합병했고, 베트멍은 봄·가을 정규 컬렉션을 2개월 앞당겨 발표했다.

공고해보였던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면서 크루즈 컬렉션이 좋은 선택지가 되고 있다. 칼 라거펠트는 WWD와의 인터뷰에서 “작은 브랜드는 연 4번의 컬렉션이 버겁겠지만 샤넬·디올·루이비통 같은 큰 하우스는 빠르게 돌아가는 패션계에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다. 크루즈 컬렉션의 항해가 당분간 지속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글=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사진=각 브랜드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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