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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벼랑 끝에 선 사람들] 차가운 시선·사회적 낙인…'자살 생존자' 이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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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편견에 죽음 원인 말하기 힘들어 / 결혼에도 걸림돌 작용 평생의 ‘꼬리표’ / 친척마저도 냉대… 우울증에 자살기도 / 상담 중 자살신호 없었냐는 질문 ‘고통’

죄책감 짓눌린 사람들 두 번 죽이는 일

세계일보

‘자살 생존자(survivor).’ 자살자의 유족, 친구, 연인 등을 가리키는 학문적 개념이다. 자살의 당사자가 아닌 이들을 생존자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들이 마주하는 충격과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허망함, 배신감 등이 복합적으로 겹쳐 우울증을 비롯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죽음에 대한 원인을 주변에 알리기도 힘들어서 마음껏 애도할 수도 없다.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편견 또한 적지 않다. 자살 생존자들은 또 다른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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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꼬리표가 된 아버지의 죽음

A(36)씨의 아버지는 2005년 2월 세상을 버렸다. A씨가 군 복무 중일 때였다. 12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렵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극단적 선택을 할 정도로 고통이 심하신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부대로 복귀한 A씨는 한동안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한 공허함과 그리움까지….

제대한 뒤에도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힘겹게 맞서야 했던 A씨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 절망했다. 특히 의지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친척들의 보이지 않는 차별에 상처가 컸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집터와 선산 분배 등의 집안 문제를 의논할 때마다 어리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것은 그나마 참을 만했다. 정말 서러운 것은 친척들과 함께해야 하는 명절이나 아버지의 기일 등에서 겪는 냉대였다. 결국 지금은 거의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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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은 결혼에도 걸림돌이 됐다. 아내가 될 사람만큼은 자신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바랐던 그는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을 상대 여성과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다가도 이 문제 때문에 몇 번 없던 일이 됐다. 아내와 결혼할 때도 처갓집에서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이제야 행복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A씨는 유족들에 대한 편견을 거두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지금도 생계 문제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뉴스를 보면 아버지가 떠올라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유족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을 느끼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렇잖아도 힘든 유족에 대한 편견을 제발 거두어 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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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아파할 수도 없었다

주부 B(58)씨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몇 차례 유산 끝에 어렵사리 가진 외동아들이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자라준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아들은 군 복무 중 여자 친구와 헤어진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슬픔에 잠겼던 B씨는 친척과 지인들에게 아들의 사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놓고도 괴로웠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아들을 욕보이게 하는 것은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결국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둘러댔고, 아직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

B씨는 장례를 치른 뒤 우울증에 걸렸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남편을 회사에 보낸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우울증이 악화돼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들은 제가 살아가는 이유였고,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그런 아이의 마지막을 숨기고 살아야 합니다. 아들이 야속하기도 하고, 너무도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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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 나의 잘못이었을까

죄책감은 자살 생존자 대부분이 직면하는 큰 고통 중 하나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는 걸 몰라줬다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된 심정이기 때문이다. C(44·여)씨도 그랬다.

3년 전 어느 날,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상을 준비하고 남편을 깨우러 갔다. 그런데 방에는 유서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남편은 온데간데없었다. 경찰에 신고하자 아침 일찍 들어온 신고가 있다며 시신을 확인하러 가자고 했다. 남편은 아파트 뒷산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는 한동안 복잡한 행정절차에 시달렸다. 세상은 C씨의 슬픔과 고통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익숙할 턱이 없는 일에 주민센터와 차량등록소, 경찰서 등을 오가며 우왕좌왕하는 C씨에게 원칙만 내세우며 매몰차게 굴었다.

분노와 상실감, 배신감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던 C씨는 심리 상담을 받으며 비로소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상담사에게 ‘자살 신호’ 질문을 받았다. 세상을 떠나기 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그런 게 있기는 했다. 남편은 숨지기 전날 뜬금없이 셀카를 찍고는 잘 나왔냐고 물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서에는 그때 찍은 것을 영정사진으로 해달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이 세상을 버리겠다는 신호였을까.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남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남편은 버릇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C씨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사가 무심코 던진 자살 신호에 대한 질문이 심적 고통을 안겼다.

“자살 신호 같은 건 없어요. 가뜩이나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유족들에게 자살 신호를 운운하는 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짓입니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회부 경찰팀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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