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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난민과 노숙인 위한 레스토랑, 이탈리아 대표 셰프가 만든 작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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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밀라노의 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는 난민과 노숙인을 위한 레스토랑이다. 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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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가 버려진 극장이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노숙인과 난민들을 위한 공간이다. 최고의 셰프들이 이곳 주방에 선다. 멀건 스프에 딱딱한 빵이 아니라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맛좋은 요리가 나온다. 노숙인도, 난민도 모짜렐라와 파마산 치즈를 곁들인 주키니호박 요리와 라즈베리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있다. 이곳 ‘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밀라노 식당이란 뜻)’를 세운 마시모 보투라(55)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하루에 1시간 쯤은 아름다운 식당에서 아름다운 음식을 먹으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난민 위해 레스토랑 차린 세계 최고 셰프

보투라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셰프다. 그가 고향 모데나에서 운영 중인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는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별 3개를 받았다. 지난해 6월에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보투라가 밀라노에 라페토리오를 세운 건 2015년이다. 밀라노 세계엑스포 기간 남는 식재료를 기부받아 빈민과 노숙인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식재료 낭비를 줄이고 허기진 이들의 배를 채워야 한다는 건 그의 오랜 철학이지만, 라페토리오를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엑스포가 열리는 5개월 동안 진행하는 단발성 이벤트로만 계획했다. 보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계획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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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트리오 엠브로시아노를 세운 이탈리아 대표 셰프 마시모 보투라(왼쪽에서 두번째)가 주방에서 자원봉사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라페트리오 엠브로시아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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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자선단체를 통해 보투라의 아이디어를 알게 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라페토리오를 행사 후에도 계속 운영할 수는 없는지 물었다. 이왕 식당을 세운다면 정말 가난한 이들이 많은 곳에 식당을 세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교황은 밀라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그레코 지역의 가톨릭 신부 돈 줄리아노를 보투라에게 소개했다. 줄리아노 신부는 성당 옆 버려진 극장을 레스토랑으로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보투라는 ‘영혼을 위한 음식(Soul for Food)’이라고 이름 붙인 사업 재단을 만들었다.

■모두의 식당, 모두의 요리

“여기는 수년간 아무도 찾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쥐들만 가득했고, 마약상들이나 찾는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한 일을 보세요. 우리는 이곳에 빛과 아름다움과 음악과 요리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보투라는 취재를 나온 영국 가디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1930년에 지어져 이미 오래전 황폐해졌던 극장 그레코는 6개월만에 화사한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2015년 밀라노 엑스포 때 ‘지속가능한 세상’을 주제로 ‘파빌리온 제로’ 테마관을 총괄했던 아트디렉터 다비데 람펠로가 건물 개조 작업을 이끌었다.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와 건축가, 가구 회사들이 각자의 재능을 살려 변신을 도왔다. 세계 각국 유명 셰프 60여명이 머리를 맞대고 레시피를 개발했다. 감자 껍질과 딱딱해진 빵처럼 라페토리오가 없었다면 쓰레기통으로 향했을 식재료들이 창의적인 요리로 탈바꿈했다.

라페토리오는 지금도 지역 사회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재료, 맛과 품질에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모양이 상해 팔기 어려운 식재료들이 이곳에 모인다. 밀라노에서 손꼽히는 셰프들이 자기 식당일을 하루씩 포기하고 돌아가며 라페토리오 주방에 선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보조 역할을 하며 셰프 2명과 함께 매일매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요리 100인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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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맞을 준비를 마친 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 라페트리오 엠브로시아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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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투라는 라페토리오가 한끼 끼니만 때우는 곳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노숙인이든 난민이든 누구나 맛좋은 요리를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투라는 “20분도 안돼서 접시를 비우고 도망치듯 식당을 떠나던 손님들이 이제는 요리 맛을 두고 불평을 한다”면서 “손님들이 불평을 시작했을 때 우리가 비로소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투라는 라페토리오를 밀라노 바깥, 이탈리아 바깥에도 세우고 싶어한다. 지난해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현장을 찾아 ‘라페토리오 가스트로모티바’를 열었다. 선수촌에서 남은 식재료를 모아다 인근 빈민과 노숙자들을 위해 매일 5000인분의 식사를 만들었다. 전세계 셰프 80명이 리우식당에 함께 했다. 올림픽이 끝난 지금도 리우의 라페토리오는 지역 슈퍼에서 식재료를 받아 무료로 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록펠러재단으로부터 65만달러 후원을 받았다. 미국에 2곳 이상 라페토리오를 세우는 조건이다. 지난 8~9일 퇴임 후 첫 해외 나들이로 밀라노를 찾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도 보투라에게 후원을 약속했다. 오바마는 9일 밀라노에서 열린 식량혁신회의 기조 연설자로 참석하기 전 아내 미셸과 함께 보투라의 밀라노 라페토리오를 찾았다.

■“변명은 필요없다”

다음달에는 영국 런던에 보투라의 식당이 문을 연다. 식량 낭비와 굶주림에 맞서 싸우는 영국 자선단체 펠릭스 프로젝트와 손을 잡아 ‘라페토리오 펠릭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보투라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난민에게 문을 닫고 노숙인들을 멀리 하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래서 밀라노에서 했던 일들을 런던에서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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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에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보투라의 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를 찾았다. 마시모 보투라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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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 라페토리오 가스트로모티바 등 지난 2년여간 ‘영혼을 위한 음식’ 재단이 진행한 사업을 통해 버려졌을 음식 재료 25톤이 훌륭한 요리로 변신했다. 난민과 노숙인 1만6000명이 맛있는 요리와 함께 ‘하루 1시간’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나 전세계 8억명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고, 매년 생산되는 음식과 식재료 13억톤 가운데 3분의1은 버려지고 있다.

보투라는 라페토리오 엠브로시아노 건물 앞에 ‘변명은 필요없다(No More Excuses)’라고 쓴 네온사인 간판을 세웠다. 오른쪽 팔뚝에도 같은 문구를 문신으로 새겼다. 음식이 넘쳐나는데도 정작 굶주리는 이들은 구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 보투라가 전하는 메시지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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