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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단독] 빨간펜식 글쓰기 지도 받는 서울대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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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대 신입생 10명중 4명 글쓰기 낙제점

매일경제

# 서울대 공대생들에게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A교수는 얼마 전 학생들 과제물을 채점하다 깜짝 놀랐다. '거시기하다' '기대 만빵' 등 황당할 정도의 구어식 표현과 통신 문체들이 여과 없이 과제물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공대뿐 아니다. 인문대의 B교수는 "시험지를 채점할 때마다 의미 파악 자체가 안 되는 문장을 써놓거나, 글의 내용과 수준 자체를 대학생 것으로 보기 민망한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B교수는 "작년 국정농단 사태 때 최순실의 딸 승마선수인 정유라의 '달그락 훅 하면 쉽게 된다'는 과제물 글쓰기가 논란이 됐는데 채점을 하다 보면 서울대생도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가 '글쓰기 부진 학생'에 대해 '빨간펜'을 꺼내 들고 직접 첨삭 지도에 나선다. 나아가 체계적인 글쓰기 교육을 전체 학생 대상으로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인간의 창의성이 가장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글쓰기 능력이 학업 수준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사회적 리더 배출을 위한 교육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글쓰기 능력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22일 서울대에 따르면 이 학교 교무처와 기초교육원은 글쓰기 교육을 강화하고 교육 커리큘럼을 통합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글쓰기 지원센터'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학교 측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 글쓰기 전담 교수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계획안 마련을 위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올해 9000만원의 연구지원 예산도 배정했다. 김기현 서울대 교무처장은 "글쓰기는 사회 각 분야 잠재 리더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이자 생산 및 창조 역량의 요체"라며 "장기적 관점으로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해외 대학을 벤치마킹해 체계적인 글쓰기 교육 체계를 만들자는 게 센터 설립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사교육에 '올인'하다 글쓰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우리나라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글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은 그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최고 수준 학생들이 입학한다는 서울대도 예외가 아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이 지난 2~3월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253명을 대상으로 올해 처음 도입한 '글쓰기 능력 평가'에서 87명(34.3%)이 100점 만점에 70점 미만을 받았다. 70점 미만은 '수우미양가' 평가에서 '양' 이하에 해당하는 점수다. 전체 응시자의 평균점수는 73.7점에 불과했다. 특히 전체 응시자의 4명 중 1명에 달하는 63명은 서울대의 정규 글쓰기 과목을 수강하기 어려울 정도로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분석됐다. 이들은 '근거 없이 주장을 제시하고' '주제를 벗어난 글을 쓰고' '명확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한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학교 측은 이번 학기 글쓰기 평가에서 하위 점수를 받은 24명을 선별해 '1대1 글쓰기 멘토링'을 진행하고 있다. 학부생을 대상으로 '글쓰기의 기초' '과학과 기술 글쓰기' 등 다양한 글쓰기 교과목도 개설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자유전공학부에 재학 중인 최 모씨(24)는 "자신이 글쓰기가 부족하다고 자각조차 못하다가 취업 준비 과정에서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깨닫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해외 명문 대학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글쓰기를 교육의 핵심 분야로 강조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대부분 대학이 '글쓰기 센터(Writing Center)'를 두고 글쓰기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킨다.

하버드대에서는 학부와 대학원생을 위해 세분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학생 전원이 글쓰기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 MIT에서는 시인·소설가, 역사가, 과학자 등 다양한 전문 분야의 전담 교수진 30~40명을 두고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서울대 이사회는 '글쓰기 지원센터 설립' 등의 내용이 담긴 2017년도 대학운영계획을 심의·의결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운영계획안이 이사회에서 의결됐으니 향후 추진계획 수립과 내부 의견 수렴을 거쳐 과제들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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