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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잠 못드는'호모나이트쿠스'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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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新 야간 문화

밤에 더 북적대는 서울… 야근·사교육 많은 현대인들, 밤에 깨어있는 것 익숙해

낮에 쌓인 피로 밤에 푼다

유흥 주점 위주였던 야간… 활동범위 넓어져운 동 등 자기 관리 하기도

#1. 대기업에 다니는 최수연(29)씨는 퇴근 후인 오후 9시부터 진짜 삶을 시작한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오후 10시 시작하는 중국어 학원에 다닌다. 중국어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밤 12시에 시작하는 요가 학원으로 향한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강남역이나 이태원역, 신촌 등에서 친구들과 늦은 저녁을 먹는다. 술을 마시기도 하고 함께 영화나 연극을 본다. 최근엔 오후 9시 30분까지 야간 개장하는 경복궁이나 동대문시장을 찾아 쇼핑한다고 했다. 최씨는 "주말에도 출근이 잦아 낮엔 놀 시간이 안 난다"며 "요즘은 밤에 노는 사람이 많고 야간에 여는 곳도 많아져 낮보다 더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2.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강희준(35)씨의 취침 시간은 오전 5시다. 밤 11시쯤 퇴근하는 그는 지난해부터 회사 근처 24시간 헬스장을 다닌다. 한 시간쯤 운동을 한 뒤에는 다른 스타트업 대표들과 만나거나 골프 연습장에 간다. 직원들과 회식도 보통 새벽 1시에 시작한다고 했다. 강씨는 "예전에는 새벽에 여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요즘은 새벽 1~2시에 나가도 길거리에 사람이 넘쳐난다"며 "체질상 밤에 생활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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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지난해 만든 홍보 동영상은 ‘밤에 더 빛나는 서울의 열정과 즐거움’을 주제로 했다. 광고에는 서울 시내 야간 드라이빙, 한양 도성 산책을 비롯해 청담동 클러빙과 명동 루프탑 파티 등 늦은 밤 서울의 풍경이 등장한다. / 서울시 홍보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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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호모나이트쿠스(homo nightcus)'가 자리 잡고 있다. 호모나이트쿠스란 인간을 의미하는 'homo'에 밤이라는 뜻의 'night'를 붙인 신조어다. 온라인 빅데이터 전문 업체 다음소프트에서 블로그·트위터·커뮤니티 등을 분석한 결과 '호모나이트쿠스'가 언급된 것은 2013년 총 6만2800여건에서 지난해 10만3100여건으로 늘었다. '야식' '야시장' '새벽' 등 호모나이트쿠스와 연관된 검색어도 41만6000건에서 69만4000건으로 66%가량 증가했다. 한밤중에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많다. 배달의 민족에 따르면 지난달 밤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배달의 민족 앱으로 야식을 주문한 건수는 300만건에 달한다. 하루에 10만건꼴이다. 이 시간대 주문 건수는 지난 6개월 사이 15% 늘었다.

전문가들은 야근이 많고 자기 관리가 필수적인 것처럼 돼버린 우리나라 분위기가 호모나이트쿠스를 양성했다고 분석한다. 다음소프트 최재원 이사는 "야간 자율 학습이나 학원 때문에 청년들이 밤 시간대에 깨어 있는 게 익숙하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동 시간이 길어지면서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들이 밤에라도 그것을 해소하는 형태"라며 "과거에는 야간의 활동 범위가 술집이나 유흥주점으로 제한됐지만 요즘은 운동을 하거나 자기 관리를 하는 등 소비적이지만은 않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호모나이트쿠스를 잡기 위한 기업들의 움직임도 발 빠르다. CGV는 2012년부터 서울 강남점을 24시간 극장으로 바꿨다. 지난여름 성수기엔 전국 CGV의 89%가 새벽 2시 이후에도 영화 상영이 가능한 심야 극장으로 운영했다. CGV 관계자는 "새벽 2시뿐만 아니라 새벽 4시에도 영화를 보려는 관객이 있어 번화가인 CGV 강남점을 아예 24시간 영화관으로 만들었다"며 "심야관객들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야간 개장을 하고 음식점도 심야 영업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수요일과 토요일 밤 9시까지 문을 연다. 새벽 5시까지 운영하는 이태원 심야 식당 2의 권주성 오너셰프는 "올빼미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문 닫는 시간을 늦췄다"며 "새벽 1시에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이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에서 제작한 서울 소개 광고 영상도 온통 야간 놀거리로 채워졌다.

밤에 활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스마트폰 앱도 나왔다. 지난 17일 출시된 '밋잇챗(Meet Eat Chat)'은 우리나라 심야 식당, 야간 놀이동산, 심야 쇼핑, 야간 레저 등 호모나이트쿠스만의 정보를 외국인과 공유할 수 있는 앱이다. 이 앱을 만든 이준우 대표는 "외국인은 야간을 '여행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느끼지만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길거리가 더 북적대는 활동적인 시간"이라며 "한국의 야간 문화를 전파하고 싶다"고 말했다.

170만 조회 수를 기록한 유튜브 동영상 '외국인이 놀란 한국인의 7가지'에는 선진적인 대중문화, 빠른 인터넷 속도와 함께 한국의 밤 문화가 소개됐다. 찜질방에서 밤을 새우거나 일이 끝난 늦은 밤에 직장인들이 함께 술 마시러 가는 것이 충격적이라는 내용이다. 제작자는 영상 끝 부분에 "한국인의 이미지는 좋았으나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 같아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잠들지 않는 한국인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이었다.

[김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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