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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Why] "아프리카 고추 농장 투자하면 연금 준다"… 1400명 등쳐먹은 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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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에서 前대통령과 찍은 사진

특별고문 임명장으로 피해자들 안심시켜

"가족·친구까지 투자" 대부분 은퇴한 노인들

조선일보

자영업을 하다 은퇴한 황모(75)씨는 2015년 6월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 있는 농장에 투자하면 매년 400만원씩 연금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A농업협동조합 사업 설명회를 찾았다. 코트디부아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황씨는 이 설명회에서 협동조합 대표 권모(52)씨를 만났다. 그는 황씨에게 "2003년 코트디부아르 전 대통령 로랑 그바그보에게 경제특별고문으로 임명받고 신임을 얻어 토지 1040㎢ (10만4000㏊)를 공짜로 30년간 임차했다"며 "서울시 면적(605㎢) 1.7배 크기 고추 농장에서 1년에 최대 4번까지 수확이 가능해 수익이 확실하다"고 광고했다.

권씨는 "출자금 10만원, 연회비 3만원을 내고 조합 농장에서 자란 산양삼을 400만원어치 사면 정조합원이 된다. 정조합원은 고추 농장 1㏊에서 나는 수익의 10%인 연간 400만원 정도를 30년 동안 지급받는 계좌를 받는다"고 약속했다. 미심쩍어하자 그는 코트디부아르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과 프랑스어로 된 경제특별고문 임명장을 보여줬다. 황씨는 "권씨가 대통령에게 라면을 건네는 사진과 임차했다는 토지의 지적도를 보고 의심을 거뒀다"고 말했다.

권씨는 황씨에게 정조합원 2~3명을 가입시킬 때마다 고추 농장 계좌 1개를 추가 지급하고 1년 동안 월 120만원씩 급여를 주겠다며 다단계 방식으로 조합원을 모집하게 했다. 황씨는 "확실한 사업 같아서 바로 가입하고 아들·며느리부터 주변 친구 모두 추천해 가입하게 했다"고 말했다. 새로 데려올 사람이 없는 경우 산양삼 400만원어치를 추가 구매할 때마다 계좌를 늘려줘 기존 조합원 투자 금액을 늘리게 했다.

지난해 7월까지 협동조합 사업은 순조로운 듯했다. 약속한 날짜에 급여와 수익금이 꼬박꼬박 입금됐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계좌를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해 지인을 끌어오거나 사채까지 써가며 투자 금액을 불렸다.

그러나 지난해 8월 갑자기 권씨가 잠적했다. 조합원에게 지급되던 수익도 끊겼다. 권씨와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조합원들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5개월 넘게 기다리다 지난 1월에야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권씨를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소했다. 파악된 피해자 1400여 명 대부분은 은퇴한 노인이었다. 황씨는 "내 말을 믿고 가족과 친구들 돈까지 1억원 넘게 투자했는데 지금은 다 연을 끊었고 나는 노숙자가 됐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합이 약속한 서울시 1.7배 크기 코트디부아르 고추 농장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 조합은 2015년 10월 코트디부아르에서 2.55㎢(255㏊)를 20년간 빌리는 계약을 맺었는데 벌목과 개간이 필요한 황무지였고 연 임차료 1500만원을 내지 못해 계약이 해지됐다. 경찰은 "권씨가 현지인을 고용해 빌린 땅에 고추를 재배하고 지난해 한국으로 고추 100㎏을 보내기도 했지만 실제 수익은 확인되지 않은 '미끼용 사업'에 가깝다"고 했다.

이 조합은 인도네시아에서 천연 비료 원료인 구아노 120만t 채굴 및 판매권을 확보했고 인도네시아 최고급 커피를 조합원에게 원가 수준에 특별 공급한다고 광고했지만 실제 진행된 사업은 하나도 없었다. 뿌리당 5만원에 판매한 산양삼도 시가 3000원짜리 일반 인삼으로 밝혀졌다.

15계좌를 구입해 6000만원가량 피해를 본 B(70)씨는 "대표 권씨가 매달 네이버 밴드에 현지에서 찍은 사진과 사업 경과를 올려 조합원을 속였다"며 "매달 들어오는 수익금 때문에 조합원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B씨는 "사기 피해 충격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사람도 있지만, 피해자 대부분은 지금도 대표가 귀국하면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조합을 고소한 일부 조합원을 원망하고 있다"고 했다.

주(駐)코트디부아르 한인회 관계자는 "기후와 물류비용을 따져보면 이곳에서 고추를 키워 한국에 판다는 계획부터 터무니없다"며 "현지 노동자 일당이 밀려 잡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교민 사회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라 사기를 벌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 주한 코트디부아르 대사관은 "협동조합 대표 권씨가 2003년 전 대통령에게 고문 임명장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현지 사업에 관심을 가지며 대사관도 종종 방문했다"며 "사기 행각에 대해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영등포경찰서는 1491명에게서 총 120여 억원을 챙긴 혐의로 권씨와 함께 일한 일당 8명을 붙잡고 그중 간부 역할을 한 최모(51)씨를 비롯한 3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핵심 역할을 한 권씨는 해외 도피 중이며 수배를 내린 상태다.

[이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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