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부부간이란 … 5년 전 ‘간 나눈’ 161세 잉꼬부부의 사랑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최고령 간이식 백지용·정민소씨

간암 재발한 남편에 간 70% 이식

자식들 말렸지만 “죽어도 같이 죽자”

세계 의학사에 유례없는 수술 성공

56년 한마음 ‘부부의 날’ 큰 귀감

18일 오후 1시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 병원동 1층 구내식당. 아내 정민소(81)씨가 고기 볶음 반찬을 국에 헹궈 남편 백지용(80)씨의 수저에 얹어 준다. 김치도 마찬가지다. 신장이 좋지 않은 남편이 나트륨을 덜 먹게 하기 위해서다.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백씨가 아내의 식판까지 치우고 온수와 냉수를 적당히 섞어 아내에게 건넨다.

“저 양반이 안쓰러워요.”

중앙일보

‘56년 잉꼬부부’ 백지용 정민소씨가 18일 국립암센터 뒤뜰에 앉아 있다. 정씨는 5년 전 76세에 남편에게 간을 기증했다. 세계 최고령 기록이다. [우상조 기자]




백씨는 아내를 ‘저 양반’이라고 칭했다. 자신에게 간을 떼준 걸 두고 하는 말이다. 2012년 4월 정씨는 자신의 간 70%를 간암을 앓던 남편에게 줬다. 당시 정씨는 만 76세, 백씨는 75세였다. 의학계에서는 부부간의 장기 기증을 최고의 사랑으로 평가한다.

백씨 부부의 사례는 사실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술을 집도한 국립암센터 김성훈 장기이식실장은 “지금도 76세 간 기증은 세계 최고령 기록이다. 서구에는 60대 기증자가 아예 없고 일본에 몇 명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세계 간이식 교과서는 생체 간기증이 가능한 최고 연령을 55세로 본다.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정씨가 의학교과서를 새로 쓴 것이다. 지금까지 간 기능에 어떤 문제도 없다. 김 실장은 2014년 간이식 분야의 세계적 권위지인 ‘미국이식학회지’에 부부 사례를 소개하는 논문을 실었다. 당시 학회지 편집장은 “아무나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고 한다.

김 실장은 “두 분이 잉꼬부부다. 남다른 부부애가 수술 성공의 정신적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씨는 2004년 간암이 발병해 간의 일부를 잘라냈다. 54세에 은행을 퇴직할 때까지 술을 너무 즐겨 마셨고 B형간염을 치료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2011년 간암이 재발했다. 3기였다. 수술할 수 없는 상태여서 색전술(혈관을 막아 암세포를 말려 죽이는 것)을 시도했으나 듣지 않았다. 6개월도 채 못 산다는 진단이 나왔다. 유일한 치료법은 간이식뿐이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치료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둘이 살다 남편을 먼저 보내면 어떻게 살지 막막하더라고요.”

정씨는 무조건 간을 떼 주기로 맘먹었다. 하지만 의료진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76세 할머니의 간을 이식한 전례가 없고, 자칫 잘못될 수도 있어서였다. 정씨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40년 동안 운동을 해서 다진 몸이에요. 지금까지 감기 한 번 안 걸렸고 고혈압·당뇨 같은 흔한 질병도 없어요.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생떼를 못 이겨 김 실장이 “그러면 검사해 보자”고 물러섰다. 김 실장의 고백이다.

중앙일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검사에서 뭔가 이상이 나올 테고 그걸 내세워 수술을 안 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아무 이상이 없는 거예요. 고령인 점 말고는.”

정씨는 수술 날짜 잡은 것을 자식(아들 둘, 딸 하나)에게 숨겼다.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다. 그런데 들키고 말았다. 자식들이 나섰다. 하지만 셋 다 B형간염을 앓은 흔적이 있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수술 전날 밤 딸(47)이 “엄마가 잘못되면 우리는 고아가 된다”며 간곡히 말렸지만 정씨를 막지 못했다.

정씨는 수술 날짜를 잡고 나서 남편의 배(간 있는 부위)에 자신의 배를 비볐다. 정씨는 “킹짱구(남편의 간)가 왕짱구(내 간)와 친구가 돼 잘 받아들여 달라고 기도했지요. 거부 반응이 없던 게 이런 이유가 있지 않았나 해요”라고 말했다.

백씨의 아내 사랑도 정씨 못지않다. 백씨는 아내의 건강이 조금이라도 나빠질까 봐 ‘셰프’를 자처한다. 항상 장을 보고, 아내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요리와 닭볶음탕을 내놓는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려 저지방 우유를 타 아내에게 건넨다. 청소도 백씨 몫이다.

부부는 “우리는 같은 날 세상을 뜨기로 했다. 안 되면 같은 달이라도 좋다”고 말했다. 정씨는 “요즘 이혼을 많이 하는데, 헤어지고 나면 절대 그만 한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남자는 항상 ‘아기’라고 생각하고 보듬어야 해”라고 했고, 백씨는 “아내 말을 들으면 행복이 따라온다”고 화답했다.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백씨 부부는 늘 “예쁘고 고맙다”고 말한다. 항상 상대방을 존중하는 이 마음이 56년 ‘닭살 부부’를 유지하는 비결인지 모른다.

◆부부간 장기이식
신장이식에선 배우자가 기증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지난해 414명이었다. 간 기증자는 자녀가 221명으로 가장 많다. 간 상태가 좋고 떼내도 원상회복되기 때문이다. 배우자 기증은 97명에 불과하다. 두 장기 모두 ‘아내→남편’ 기증이 그 반대 경우의 두세 배에 달한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신성식 기자 ssshin@joongang.co.kr

▶SNS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포스트]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