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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한열 열사 촬영한 네이선 벤, “혁명 목격자, 매우 큰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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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88올림픽 직전 모습 담기 위해 한국 찾았지만

시민·학생들의 시위 모습에 관심갖고 사진 찍어

“연대 앞 굴다리, 시위 모습 담는 최적의 장소

기자들 사이에선 ’연세 해변’으로도 불려”

“이한열 피격, 너무 급작스러웠다

미국에 돌아온 후에야 이한열의 모습이 찍혔다는 것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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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9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당시 경영학과 2학년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고, 도서관학과 2학년생이었던 이종창씨가 뒤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다.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찾은 사진기자 네이선 벤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 굴다리 위에서 이 모습을 포착했다. 네이선 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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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9일.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방문했던 네이선 벤(당시 36)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위 모습을 담기 위해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 앞 굴다리에 올랐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예정되어 있던 ‘6·10대회’를 하루 앞두고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던 이날은 평소보다 더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정문 밖으로 나온 학생들을 향해 전경이 최루탄을 발포하던 그때, 당시 경영대학 2학년생이던 이한열은 직격으로 발포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같은해 1월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에 이어 피격 한달 만에 숨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한열이 쓰러지는 모습은 외신 기자에게도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한겨레>는 전자우편을 통해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네이선 벤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한국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1972년부터 1991년까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이듬해 열리는 서울올림픽을 맞아 특별호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의 다양한 모습을 담기 위해 1987년 2월부터 1988년 1월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외신 기자들의 취재 기회를 풍부하게 보장해주는 분위기였다.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찍을 목적으로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한 직후 대우·금성전자 공장이나 비무장지대(DMZ), 농촌지역, 부산의 수산시장 등을 방문하며 한국의 모습을 담았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연세대를 포함해 서울시내 곳곳에서 일어났던 시위에 참석했다. (이한열 피격 전에도)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조금 있었지만, 외신기자들에게 시위는 그다지 관심을 끄는 주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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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21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시위하고 있다. 네이선 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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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의 시위 분위기는 어땠나.

=연세대학교는 서울 시내 대학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시위가 많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4~6월 동안 나는 자주 연세대학교를 방문해 사진을 찍었다. 특히 6월 초 연세대학교에서는 거의 매일 큰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학생들은 거의 매일 학교에서 행진을 했고, 정오쯤에는 정문으로 나와 정문 앞 도로를 둘러싸고 있던 전경들과 대치했다.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는 굴다리가 있었는데, 그 곳은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는 모습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 모인 사진기자들은 굴다리를 ‘연세 해변’(Yonsei Beach)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였다. 이한열이 피격당했던 6월9일에도, ‘연세 해변’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한열 열사 피격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달라.

=그날 ‘텔레포트 렌즈’(표준 렌즈보다 초점거리가 짧은 렌즈)로 사진을 찍고 있어서, 누가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전경의 공격으로 인해 학생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것은 당시에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몇 주 뒤 미국 워싱턴에 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필름을 검토한 뒤에야 이한열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위가 격렬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심각하게 다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전경들은 최루탄을 ‘총알’(bullets)이 아닌 ‘진압’(suppression)의 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취재기자들은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보다는 위험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사진기자는 최루탄 파편으로 인해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나 역시 최루탄으로 인해 사진을 찍고 있던 손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어디선가 최루탄 보관용기가 날아와 오른쪽 어깨를 맞아 쓰러졌고, 몇 주간 통증을 참아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한다고 생각한다면, 고통은 참을만한 것이었다. 이한열이 피격된 뒤엔 거의 매일 ‘연세 해변’으로 가서 시위대의 모습을 담았다.

-이한열 열사 피격 직후 분위기는 어땠나.

=일단 6월 중순부터 많은 외신 기자들이 한국을 찾았다. 1980년에 있었던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어 시위가 지속된다면 88 서울올림픽이 열리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수백여명의 학생들을 공격하는 걸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 세계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시위대에게도 조금의 안정감을 주고 있을 것이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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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22일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 시위대가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문구가 쓰인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쓴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네이선 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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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기념사업회에 사진을 제공하게 된 이유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 당시 한국에서 찍었던 사진 수백여장을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전시를 위해 사진을 제공해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자신의 삶과 미래를 걸고 억압적인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던 연세대학교 학생들, 시민들과 당시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매우 영광이다. 1987년 혁명의 목격자였던 것도 매우 큰 특권이라 여기고 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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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0일 시위대를 진압하는데 쓰인 최루탄 보관병이 서울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다. 네이선 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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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23일 서울의 한 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한 남성이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모습. 네이선 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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