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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단독] `도로위 시한폭탄` 중증질환자 운전대 못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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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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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부산 해운대 교차로에서 한 외제차가 '광란의 질주'를 벌여 3명이 숨지고 21명이 다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장면이 담긴 블랙박스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외제차는 시속 100㎞의 속도로 달리며 중앙선을 넘나들었다. 보행자를 향해 돌진하는가 하면 마주 오는 차들과 충돌하면서 질주했다. 알고 보니 운전자는 뇌전증(간질) 환자였다. 사고 2주 전 진행된 운전면허 적성검사에선 뇌전증 사실을 숨긴 채 면허를 갱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8월에는 강원도 평창군 소재 영동고속도로 봉평터널 입구에서 관광버스가 앞서가던 승용차 5대를 연쇄 추돌해 41명의 사상자를 냈다. 시속 90㎞로 질주하던 버스는 앞선 차량과 거리가 좁혀지고 있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차량을 들이받았다. 추돌한 승용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파됐고, 차량에 타고 있던 20대 여성 4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사고를 낸 버스 운전사는 기면증(깜빡깜빡 조는 과수면증)을 앓고 있었는데도 운전대를 잡았다. 앞으로 이처럼 도로 위 교통 안전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환을 가진 운전자들은 운전대를 잡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중증 질병을 가진 운전자들이 6개월 이상 장기입원 치료를 한 기록만 없다면 아무런 제재가 없었다. 그러나 중증 질병을 가진 운전자들의 과실로 인한 교통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고삐를 죄기로 했다. 장기입원 기록이 없더라도 고위험 중증질환자의 신규 면허 발급과 면허 갱신을 제한하는 강도 높은 면허 관리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4월 30일 경찰청에 따르면 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증질환의 종류를 명확히 분류하고 증상을 단계별로 분류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운전 면허 발급·유지를 제한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 중이다. 기면증, 뇌전증, 치매 등 신경·정신과적 질환을 포함해 협심증 등 심혈관질환, 당뇨, 알코올중독, 시력장애 등 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증질환에 대한 의학적인 기준을 신설하고 미달하면 운전대를 잡을 수 없도록 도로교통법 개정도 추진한다. 경찰은 운전면허 발급이 제한되는 질환과 증상에 대한 기준을 향후 의료기관과 협의해 진행하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고위험 중증질환 운전자에 의한 대형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이라며 "면허를 제한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든 뒤 공청회를 거쳐 연말까지 도로교통법 시행령을 개정하고 내년 상반기까지는 시행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행 도로교통법 82조는 치매, 정신분열병(조현병) 등 중증질환을 정상적인 운전을 할 수 없는 경우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시행령에 건강보험공단 등 보건당국이 6개월 이상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운전면허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로 통보하게 돼 있어 사고 예방 효과가 미진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장기입원은 하지 않았지만, 고위험 질환을 가진 사람들의 운전을 막지 못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중증질환에 대해 경찰과 보건당국의 정보 교류가 제한적이어서 통원 치료가 필요함에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운전자들을 걸러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 상태다. 운전면허 제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반면 영국이나 미국 등 해외에서는 운전면허를 발급하는 기관이 보건당국과 개인의 질병 정보를 공유해 미리 정해진 기준에 따라 중증질환자들의 운전면허를 제한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기면증 판정을 받은 환자는 원칙적으로 운전면허 발급이 정지된다. 다만 규정에 따라 일정한 치료 후 3~6개월 경과를 보고 회복되면 면허 재발급이 가능하다. 조현병 환자도 운전이 불가능하지만 3개월간 발병하지 않고 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면허 취득이 가능해진다.

현재 국회에서는 건강보험공단과 보건소 등 보건당국에서 보관 중인 개인 의료정보 가운데 정신병 등 중증질환 정보를 경찰청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보건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경찰은 중증질환자의 운전 적성 여부를 판단하는 자문위원회를 만들고, 운전면허 제한 가이드라인에 대해 의료 전문가들에게 자문해서 공신력을 높여나갈 방침이다.

[서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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