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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tvN ‘혼술남녀’ PD 비극으로 본 방송 노동환경](상)고효율 ‘방송 한류’ 뒤엔…과잉 노동·하청·해고 ‘헬조선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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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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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생한 tvN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 PD의 죽음을 계기로 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방송 한류’를 통한 콘텐츠 수출 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제작 현장에서는 제작비 절감 등 ‘돈의 논리’로,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기획 시리즈 상·하편을 통해 방송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와 대안의 움직임 등을 알아본다.


“드라마 현장에선 누구 하나 죽지 않고서는 안 바뀔 거라는 험악한 얘기가 계속 나왔어요. 힘들어서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스태프끼리 반 농담조로 ‘네가 총대 메라’고들 했죠….”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8년 동안 계약직, 독립제작사 소속 촬영 스태프로 일한 한상현씨(29·가명)는 드라마 촬영 현장을 “하루 24시간에 21~22시간 일해야 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사극 등 10편이 넘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일한 그는 “한창 심할 땐 15일 동안 밖(촬영 현장)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수면 시간이 아예 보장되지 않아 스태프는 이동 시간에 잠깐잠깐 버스에서 쪽잠을 잔다. 그는 “그 안에서 잠깐이라도 잘 수 있으니까 이동 거리가 길면 길수록 (스태프들에겐) 좋다”며 “촬영이 시작되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촬영 버스엔 스태프의 옷가지며 생활용품 등을 넣은 커다란 캐리어가 즐비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신입 조연출 이한빛 PD 사망 이후 방송 제작 현장의 가혹한 노동환경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타 캐스팅 없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해 ‘저비용 고효율’ 성공 사례로 손꼽히기도 했던 <혼술남녀>의 겉포장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아래엔 과잉 노동, 외주 스태프 일방 해고 등 방송계의 어두운 민낯이 드러난다.

수면 시간도 주지 않는 ‘극한 상황’에서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는 이유는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이다. 한씨는 “(인건비뿐 아니라) 하루에 카메라, 크레인 등 장비 대여비도 엄청나기 때문에 제작사 입장에선 촬영 기간을 어떻게 해서든 단축하려고 한다”며 “(안전을 위한) 제작인원 보충 등은 상상할 수도 없고 무조건 최소 인원으로 ‘빨리빨리’ 만드는 시스템이 당연시돼 있다”고 말했다. 총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촬영 기간을 단축하는 행태는 ‘작품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공을 더 들인다’는 사전제작 드라마 현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방송 제작 현장의 ‘고용 불안정’은 응당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권리조차 주장할 수 없게 한다. 2015년 전국언론노조와 한국독립PD협회가 조사한 독립PD 노동인권 실태조사를 보면 계약서를 쓰지 않고 구두 계약을 하거나 혹은 아예 계약 언급조차 없었던 경우가 응답자 전체의 76.6%를 차지한다.

일하다가 병이 나도 “내 돈으로 사람(대타)을 사고, 내 돈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한씨는 25~30㎏에 달하는 카메라를 메고 일하다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기 위해 10일 정도를 쉰 적이 있다. 그가 받는 하루 일당은 10만원 정도였는데 하루 ‘땜빵’ 인력을 구하기 위해 30만원이 필요했다. 그는 “내내 잠도 못 자고 일했는데 몸이 아파서 10일 쉬니까 한 달 100만원 정도밖에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돈을 조금이나마 받기 위해 완치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복대를 감고 카메라를 다시 잡아야 했다”고 말했다. 산재 인정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수술 비용도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성추행, 부당 노동 전가 등에 맞닥뜨려도 어디 호소할 수도 없다. 방송작가 김미연씨(30·가명)는 “함께 일했던 조연출과의 회식자리에서 조연출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그때 가장 답답했던 것은 어디에,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부분”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방송작가 이은희씨(31·가명)는 “계약서를 안 쓰고 한 프로그램에 외주로 들어갔는데 위에서 ‘다른 방송을 하나 더 맡아줄 수 있냐’고 물었다”며 “그러면 추가 보수가 있냐고 물었더니 유별난 애 취급을 당했다. 못하겠다고 했더니 얼마 뒤 일을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돌아왔다”고 했다. 한 기획사 제작 PD는 “이 바닥이 좁아 알음알음 추천으로 자리에 들어가다보니 한번 ‘눈 밖에 나면’ 일자리를 더 이상 구하기 어려워진다”며 “그래서 어린 친구들에게도 ‘꾹 참고 살아남으라’는 조언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한류’의 최전선으로 방송 콘텐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제작 시스템은 ‘사람을 쥐어짜는 식’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은 곧 프로그램 질의 저하로 이어진다. 독립제작사 PD는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환경에서 제작하다보니 작품에 충분히 공을 들이지 못하는 일이 많다.

15년간 프리랜서 시사교양 PD로 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온 김상준 PD(51·현 독립제작사 대표)는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본사 소속 정규 PD들은 2~3명이 할 일을 독립PD는 혼자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워낙 제작사 간 프로그램 ‘따내기’ 경쟁이 치열해 ‘협찬’이란 꼬리가 ‘프로그램’ 몸통을 흔드는 일도 다반사다. 김 PD는 “이왕이면 협찬을 많이 물어오는 제작사 프로그램을 선택하다보니 PD들은 방송 아이템 선정 과정에서부터 협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그러다보니 독립제작사 제작 다큐멘터리에선 제작비가 많이 드는 테마는 물론, 대기업이나 정부부처 협찬을 받기 곤란한 ‘민감한’ 고발성 아이템 역시 배제된다”고 말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그런 것은)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고 이한빛 PD의 유서 중)

<김지원·김향미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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