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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Why] 현수막 '명당 자리' 놓고 으르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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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간 현수막 전쟁

명당 선점 열올린 후보들

가장 효과적인 홍보방법 서로 걸겠다고 싸우다가

고소하겠다 협박하기도

애꿎은 피해보는 시민들

대형 현수막 난립에 조망권 침해·소음 피해

선거 후 처리도 문제

대부분 묻거나 소각… 썩지않는 화학물질이라 환경보호 공약과 배치

조선일보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근처 한 건널목. 대선 후보 현수막이 낮게 걸려 시민들 보행을 방해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보행로에 현수막을 걸 경우 최소 2m 이상 높이에 걸도록 권고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표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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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구 지상 15층 빌딩 '부평일번가'에서는 지금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간 '현수막 공방전'이 한창이다. 6~10층에는 문 후보 현수막(가로 21m·세로 23m)이, 12~14층에는 안 후보 현수막(가로 10m·세로 15m)이 붙어 있다. 선거용 대형 현수막은 각 당 선거연락소가 있는 건물에 하나씩 거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은 유동 인구가 많은 '현수막 명당'으로, 두 당이 모두 같은 건물에 선거연락소를 두면서 문제가 생겼다.

현수막을 먼저 건 것은 문 후보 쪽 이었다. 17일 0시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마자 현수막을 걸었다. 안 후보 측은 이틀 뒤인 19일 문 후보 현수막 바로 위에 현수막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은 "지난 3월 다른 현수막은 게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물 관리인과 합의했다"며 "안 후보 측이 허가 없이 현수막을 걸어 관리인이 고소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반면 국민의당 인천시당은 "건물 외벽 관리권이 있는 부동산 업체와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현수막을 걸었다"며 "고소하면 무고죄로 맞고소하겠다"고 했다. 건물관리인 이모(47)씨는 "대형 현수막이 햇빛을 가리고 바람에 펄럭거려 시끄럽다는 민원이 많다"며 "국민 알 권리를 위한 것이니 참아달라고 입주자들을 설득해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론 현수막을 못 걸게 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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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구 빌딩에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현수막이 함께 걸려 있다. 이 빌딩 부근은 유동 인구가 많은 ‘현수막 명당’으로 꼽힌다. / 독자 제공


전국 곳곳에서 대선 후보 간 현수막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목 좋은 장소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지난 16일 밤 11시 54분 부산 남부경찰서에 "대연동 사거리에 불법 선거 현수막이 걸렸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현수막이 공식 선거운동을 6분 앞두고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 전 현수막 게시는 불법이다. 경찰조사 결과 두 후보 측이 같은 곳에 현수막을 걸려고 기다리다 홍 후보 측에서 선거운동 6분 전에 걸어버린 것이었다. 경찰은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해 선거일 이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각 정당에서 내거는 정치 현수막 역시 광고 현수막처럼 옥외광고물 관리법 규정을 받는다. 법을 어기면 최대 500만원 벌금이 부과된다. 하지만 선거 현수막은 예외다. 선관위에 따르면, 선거 홍보물은 옥외광고물 규정 대신 공직선거법 규정을 받는다. 이에 따라 선거 홍보를 위한 현수막은 공직선거법에 따라 읍·면·동당 1개씩 달 수 있다. 신호기나 안전 표시를 가리거나 도로를 가로질러 게시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달 수 있다.

선관위는 이번 19대 대선 때 전국에 걸린 현수막이 최소 1만5000개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선관위 관계자는 "각 당에서 현수막을 얼마나 거는지 집계가 안 된다"면서도 "후보 수가 지난 18대 대선(7명)보다 늘어 더 많이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각 당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과거보다 다양한 홍보·유세 방법이 생겼지만 여전히 현수막의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지난 대선 때처럼 법이 정하는 선에서 걸 수 있는 현수막은 모두 걸었다"며 "농촌 지역이나 고령층 대상으로는 현수막만큼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 없다"고 했다. 이현출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고 후보자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어 현수막이 효과적"이라고 했다.

각 후보 진영의 현수막 경쟁으로 피해를 호소하는 시민들도 늘고 있다. 서울 마포구 한 카페 점장 서모(37)씨는 "현수막 때문에 카페 간판이 전혀 안 보인다"며 "위치를 조금 바꿔달라고 민원을 넣었지만 며칠째 감감무소식"이라고 했다. 지난 17일 오후 경기 군포시 산본시장 사거리 건널목에선 현수막이 걸려 있던 가로등이 부러졌다. 이날 비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현수막이 크게 흔들린 결과다. 지역 주민들이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큰 사고가 날 수 있었다"고 항의했지만, 선관위 측은 "게시 장소는 정당별로 알아서 정하기 때문에 선관위 책임이 아니다"라고 했다.

선거 이후 뒤처리도 문제다. 선거 현수막은 땅에 묻거나 태워서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미화 자연순환사회연대 사무총장은 "현수막은 태울 때 다이옥신 등 인체와 환경에 해로운 화학물질이 나오고, 매립해도 석유화학 재질이기 때문에 썩지 않는다"며 "후보 모두 환경보호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현수막 홍보에 목매는 건 이중적인 태도"라고 했다.

[표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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