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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진지하고 용감한 ‘젠더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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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황진미의 티브이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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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남녀>는 <교육방송>(EBS)에서 방영하는 ‘국내 최초 젠더 토크쇼’이다. 방송인 박미선이 사회를 맡고, 성우 서유리, 은하선 작가, 서민 교수, 시사평론가 정영진, 영화감독 봉만대가 고정출연한다. 여기에 여성학자 이현재와 손희정이 격주로 참여하여 전문적인 논평을 더한다. 5회가 방송되는 동안 여성의 외모 검열, 피임, 졸혼과 가사노동, 김치녀 논쟁과 데이트 비용, 시선폭력 등을 주제로 다뤘다.

<교육방송>의 토크쇼라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한 이도 많았지만, 상당히 재미있다. 발언의 수위나 논의의 질이 상당히 높은데다, 중심이 잘 잡힌 진행과 편집으로 흐름이 매끄럽다. 토크 중간에 삽입되는 ‘엑스의 방’이나 초대 손님, 실험영상 등도 잔재미를 더한다. 프로그램은 일상에서 미묘하게 느끼는 불평등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남녀 간에 이해의 장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단순히 수다를 떠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교육이 결여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성교육의 효과도 있으며, 최근 쏟아져 나오는 페미니즘 담론에 대중적으로 접근하는 성인지 교육의 효과도 지닌다. 가령 체외사정으로 피임을 한다는 봉만대 감독의 말에 체외사정은 피임법이 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짚어주거나, 원치 않는 임신에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나 기혼여성의 낙태율이 더 높다는 점을 분명히 알린 것은 교육적 성과이다.

아쉬운 대목도 있다. 가령 돈의문 박물관마을 가림막 벽화를 보여주는 대목에서, 1920년대 만평이 품고 있는 신여성에 대한 악의적인 혐오가 오늘날의 김치녀 혐오와 다르지 않으며, 여성혐오의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은 연원을 지니는지 짚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남성 가장의 헌신을 보여주는 그림”이라는 정영진의 논평에 이어 “김치녀가 등장하는 광고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보편을 가장한 맹목’의 발언을 허용하였다.

이처럼 잘못된 의견들이 마치 대등한 의미를 지니는 ‘다른 의견’인 양 다루어지는 것은 문제이다. 사회자가 마지막 후렴구로 덧붙이는 “정답이 없는 문제”라는 말도 가치를 흐리는 멘트이다. 예컨대 가사노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정영진은 “여성은 보살핌 노동을 하기에 적합한 신체구조를 지닌다”고 주장하며, “일상적인 행위에 가사 ‘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출연진들은 이러한 인식이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모성의 이름으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온 논리임을 지적하지 못했다. 이현재는 재생산노동의 개념이 생기기 이전의 낡은 인식체계라는 뜻에서 ‘주류 경제학적 인식’이라 언급했지만, 이처럼 고급스러운 논평은 오히려 정영진의 말이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착시를 낳는다. 정영진은 변화된 세계의 담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을 겪고 있지만, 도리어 데이트 비용의 부담을 동일하게 지지 않는 여성들에게 ‘문화지체’라는 딱지를 붙일 만큼 허위의식에 찌들어 있다. 출연자들은 그의 허위의식을 논박하기보다, 은근히 조롱하면서 자가당착적인 그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 박미선의 노련한 진행 능력이 빛을 발한다.

남성 페미니스트 서민 교수의 독특한 매력도 재미를 더한다. 그는 정영진, 봉만대의 어이없는 발언으로 답답함이 고조될 때, 특유의 유머로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순발력이 돋보이는데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우호적인 입지가 발언의 친화력을 높인다. 하지만 그의 유머가 자학적으로 흐르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그의 성평등 의식이 불합리한 사회구조에 대한 각성과 변화된 세계를 인식하는 지성의 산물이 아니라, 자칫 외모나 남성성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여성을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으로 보는 것도 옳지 못하다.

스튜디오에서의 토크는 정영진, 봉만대의 발언이 마치 평균적인 남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양 구성되어 있지만, 실험영상에 등장하는 실제 연인들의 모습은 좀 다르다. 경구피임약 복용이 현명한 여성의 선택이라고 강조하던 정영진은 남성 경구피임약 출시 소식에 부작용을 우려하여 먹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실험영상 속 20대 남성은 거부감 없이 먹겠다고 했다. 또한 데이트 비용의 반을 내겠다는 여성의 제안에 20대 남성은 원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남충’이라 일컬어지는 이기적인 남성의 전형에서 벗어난 젊은 남성들의 모습은 그나마 희망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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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이후에도 여성혐오적인 예능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가운데 <까칠남녀>의 출현은 고무적이다. 어쩌면 <교육방송>이기에 가능한 기획이라는 생각도 든다. ‘교육’을 표방하지 않고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정색하고 발언하기 힘든 매체환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일반 상업방송이었다면 시청률 강박으로 모든 논의가 야한 농담으로 소비되는 길을 가지 않았을까. 더 진지하고 더 용감한 발언들이 이어지길 바란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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