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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왜 우리에게 더 어른스럽기를 요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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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ㆍ특성화고 2학년 정은미

경향신문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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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학교까지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약 1시간20분. 정은미양은 하루에 왕복 3시간 가까이를 길에서 보낸다. 이제 지하철에서 인터넷 강의도 듣고, 책도 읽고, 쪽잠을 자기도 하면서 나름 계획대로 보내기 때문에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에게 부대끼는 일이나 환승을 위해 걷고 또 걷는 일은 여전히 너무 힘들다. 은미는 수도권의 한 상업고등학교 금융과 2학년이다. 은미가 다니는 학교는 특성화고등학교로 분류된다. 특정 분야 인재 및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는 학교. 쉽게 말하면 대학 진학이 아니라 취업을 목표로 직업교육을 하는 고등학교다.

은미는 스스로를 아주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친구들 다 하는 대로 피아노학원도 다니고 미술학원도 다니고 수영과 발레도 잠깐씩 배웠는데, 어느 분야에도 특별히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다. 공부하는 게 즐겁지 않았지만 숙제와 시험공부는 열심히 했고, 성적은 항상 중간 이상이었다. 당연히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수능을 봐서 대학에 가고, 이후에 취직을 하게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꼼꼼하고, 답이 정확하게 나오는 걸 좋아하고,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곧이 곧대로인 성격이라 막연히 은행 등 금융권으로 진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여러 특성화고 선배들이 학교에 설명회를 왔는데, 그때 특성화고로 진로를 결정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렵다는 얘기를 워낙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삼포세대라더니 오포세대, 칠포세대, n포세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작은 무역회사 인사팀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는 계약직 2명을 뽑는데 지원서가 100장도 넘게 들어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무원인 어머니는 요즘 9급으로 들어오는 신입들의 학벌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설명회에서 들으니 많은 기업에서 특성화고 선발 전형을 확대하는 추세고, 특성화고 공무원 특별채용 제도가 있어 일반 공무원 시험보다 유리한 점이 많다고 한다. 은미는 설명회에 왔던 선배에게 연락해 조언을 구했고, 고민 끝에 한 상업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했다.

예상외로 어머니의 반대가 너무 컸다. 은미의 어머니는 명문으로 꼽히는 여상을 졸업해 은행에서 일하다가 다시 시험을 봐서 공무원이 된 경우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방통대 학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평소 자녀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편인 데다 출신 고등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렇게 반대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머니는 집안 사정으로 여상에 진학했을 때의 좌절감, 평범하게 또래들과 대학 생활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고졸로 직장생활을 하며 느꼈던 한계들을 그제야 털어놓았다. 은미가 진학하려는 학교의 취업 자료를 보여주며 요즘은 특성화고의 분위기도, 사회의 시선도 많이 바뀌었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녀는 한 달이 넘게 말도 안 하고 지냈는데 결국 어머니가 고집을 꺾었다.

학교마다 학사 운영부터 장학금 제도, 특별활동, 방과후수업 수준이 천차만별이고 입학 성적과 수업 분위기도 편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특성화고가 전반적으로 어떻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은미가 다니는 학교는 역사가 깊다. 지역 명문학교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도 있었고 인문계에 갈 성적이 안되는 소위 문제아들의 학교로 통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학생들이 두 부류로 크게 나뉘어 중간층이 없다고 느낀다. 첫 번째 부류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소신 지원한 학생들로 학교생활도 열심이고 성적도 좋은 편이다. 두 번째는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 낮은 성적 등의 이유로 도피하듯 특성화고를 선택한 학생들이다. 안타깝게도 학교생활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결석, 지각, 조퇴가 많다.

스스로 선택했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은 은미를 적극적인 학생으로 만들었다. 국·영·수 등 일반 교과목 외에도 상업, 경제, 회계, 금융, 컴퓨터 관련 전공과목까지 배우려니 좀 버겁지만 방과후수업을 들으며 진도를 차분히 잘 따라가고 있다. 방과후수업 과목은 대체로 전공 심화와 자격증 준비 과정이라 따로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은미는 또 매경 TEST(국가공인 비즈니스 사고력 테스트)를 준비하는 경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취업캠프, 아이디어 경진대회, 경제 골든벨 등 교내 대회에도 다양하게 참여했다.

은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지난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발로 뛰어 정보를 찾고 기회를 만들어왔다. 어쩌면 아직 어린 열일곱. 철부지라고, 아무것도 모를 때라고, 공부만 하면 된다고 취급받는 나이인데 이상하게도 특성화고 학생들은 더 어른스럽기를 요구받는다. 은미도 자신을 예비 사회인으로 정체화하며 스스로 알아서 능숙하게 잘 해내려고 노력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고 어리광부리고 싶지 않았다. 잘 해왔고 지금까지는 성과도 좋은 편인데 문득문득 우울해질 때가 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동생은 요즘 언니가 다니는 학교에 관심이 많다. 학교 분위기며 시설, 급식, 동아리 활동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데 은미는 자꾸만 얼버무린다. 자신의 선택이 정말 현명했다고 믿지만 동생에게도 권유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전주의 한 특성화고 학생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애완동물과를 다니던 학생은 그 힘들다는 콜센터 해지방어팀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했다. 고객에게 시달리고 상사에게 압박받고 학교와 가족을 실망시킬 수 없어 전전긍긍했을 시간들. 은미는 자신과 같은 진로를 선택한 후 비슷한 고민을 했을 테고, 비슷한 편견과 기대를 감당했을 또래의 여고생에게 생긴 일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은미도 그동안 전공과 무관한 실습을 나가야 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학교와 선생님 입장이 난처해질까봐 실습 도중에 그만두지도 못한다고 했다. 학교가 취업률을 중요시하다 보니 취업처를 까다롭게 고르거나 원하는 직장에 합격할 때까지 버틴 선배들은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단다. 어디로든 빨리 많이 취업시키겠다는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 당장 해야 할 공부도 많고 중간고사도 다가왔지만 은미와 친구들은 학생회를 통해 계속 의견을 전했다. 학생회는 학교 취업정보실과 함께 2016년 2월 졸업생들을 추적 조사했는데, 전공과 무관한 직장에 취업한 졸업생 대다수가 이미 퇴사했거나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친·인척의 사업장에서 임시로 일하기도 했고 뒤늦게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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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이 LG 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다가 지난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홍수연양에 대한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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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00% 전공취업으로 원칙을 정했다. 그동안에는 전공취업을 ‘장려’하는 수준이었지만, 앞으로 전공과 무관한 일자리를 추천하거나 권유하는 일은 절대 없다. 전체 취업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고 교육부의 재정지원도 줄어들지 모르지만 학생들의 취업 만족도와 안정성은 높아질 것이다. 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법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도움을 줄 전문 상담인력을 두는 방법도 논의 중이다. 학교 밖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했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를 이어갔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에 대한 교육부의 실태조사 결과도 나왔고, 관리감독을 강화하자는 내용의 법안도 발의되었다.

경향신문

조남주 작가


은미의 목표는 금융감독원에 입사하는 것이다. 금감원은 매년 5명 내외로 특성화고 졸업예정자를 채용하는데 내년 이맘때 은미도 원서를 내게 될 것이다. 이제 딱 1년 남았다. 성적 관리도 잘 하고 다양한 경험도 쌓고 시험 준비도 열심히 해서 꼭 목표를 이루고 싶다. 또 재밌고 즐겁게, 때로는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고 추억도 많이 만들면서 남은 학창시절을 잘 보내고 싶기도 하다. 학교가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취업을 위한 직업소개소로 전락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은미에게도 고등학교 시절은 풋풋하고 빛나고 아름다워야 한다.

※ 언론 보도와 특성화고 재학생, 교직원들의 인터뷰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입니다.

<조남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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