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태평로] 우리는 젊을 때부터 꼰대였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딸아이를 한국 초등학교에 보내지 못하겠다며 미국으로 이사 간 음악가 한대수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과 공부보다 '엠퍼시(empathy·공감 능력)'를 가르쳐야 해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게 해줘야 합니다. 내가 다녔던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우리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신체가 다르고 능력이 제각각이란 걸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한국 학교에서는 오로지 공부만, 경쟁하는 법만 가르쳐요. 그러니까 장애가 있거나 공부를 못하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서울의 명문 사립대에서 한 장애인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양심 없는 민폐 장애인'으로 손가락질받았다는 보도를 보며 '엠퍼시'가 없는 이 사회를 돌아본다. 이 장애 학생은 학교 잘못으로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강의실을 배정받았고, 학교 측이 이곳에서 350m 떨어진 강의실로 해당 강의를 옮기려 하자 일부 학생이 "거리가 너무 멀다"며 반대해 무산됐다.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양심이 있으면 장애 학생이 수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글도 올라왔다고 한다.

이 대학에 다닐 정도면 아마 중·고교 성적이 전교 수위권에 머물던 학생들일 것이다. 온갖 과외에 선행학습에 자율학습까지, 공부와 경쟁에는 이골이 나고 도가 튼 경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일부 학생에겐 인간이 반드시 가져야 할 능력 하나가 없다. 바로 '엠퍼시'다. 학교의 실수로 문턱 있는 계단 강의실에 배정됐는데도, 학교 탓을 하지 않고 동료 학생의 장애를 탓했다. 그 머릿속에 '장애가 문제다'라는 생각이 박혀있다가 발로(發露)한 것이다. 그 학생이 장애를 선택했는가. 왜 장애가 문제인가.

조선일보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서울의 한 건물 계단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멈춰 서 있다. /조선일보 DB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일세 열린세상국민문화운동본부 대표는 1996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이 대학원 교수·직원·학생을 통틀어 유일한 휠체어 장애인이었다. 입학하자마자 학교 측이 그에게 "불편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본관 중앙 출입문이 수동식이어서 불편하다"고 했다. 학교 측은 즉각 출입문을 자동문으로 바꾸는 공사를 시작했다. 단 한 명의 장애 학생을 위해 대학원 전체가 공사에 따른 불편을 감수한 것이다.

1912년 타이태닉호 침몰 사고 때 하버드 졸업생 한 명도 숨졌다. 그의 어머니는 하버드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하면서 "하버드생들은 졸업 전까지 수영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를 받아들인 하버드가 수영을 필수과목으로 정했으나 '장애인 차별'이라는 지적이 일었고 결국 철회했다. 우리는 이것을 장애인에 대한 '특혜'라고 생각하지만 미국인들은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버드나 미국의 힘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들 몸에 밴 '엠퍼시'의 힘이다.

우리는 태교(胎敎)하면서 영어를 가르치고 영·유아 때 선행학습을 시키며 중·고교 때는 가족들이 숨죽여 가며 아이가 공부에만 몰두하게 한다. '네가 최고가 돼야 한다'는 식의 교육은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라'는 교육의 다른 이름이다.

공부 잘하고 경쟁에서 이긴 학생들이 모인 대학에서 벌어진 일을 보며 한 가지 깨달았다. 우리는 젊을 때 이미 꼰대였다. 나이 들면서 꼰대가 된 게 아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 모두 꼰대가 되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