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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기자의 시각] '취임 기념' 追更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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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손진석 경제부 기자


재정학을 전공한 교수와 며칠 전 통화했다. 그는 화가 난 목소리였다. "추경이 대통령이 취임할 때 내놓는 대국민 선물이라도 됩니까? 환자 목숨이 왔다갔다할 때 마지막 처방처럼 써야 하는 게 추경인데, 설날에 세뱃돈 주듯 쉽게 나랏돈을 쓰려는 것 같아요." 당선이 유력한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취임 후 추경을 편성해 돈을 풀겠다는 구상을 밝히자 적잖게 실망했다는 것이다. 문 후보는 취임 직후 10조원대 일자리 추경을 편성하겠다고 했고, 안 후보도 소비 침체 극복을 위해 추경을 고려할 여지가 있다는 입장을 표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신용등급이 높은 결정적인 이유는 재정이 건실하기 때문이다. 3대 경제 주체 중 가정과 기업이 모두 빚더미에 올라 신음하고 있지만, 정부가 버팀목이 되고 있다. 경제 규모(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38%라서 OECD 평균(116%)보다 훨씬 낮다.

하지만 근년에 재정 지표가 악화되는 속도는 아찔할 정도로 빠르다. 2010년 392조원이던 국가채무가 작년엔 627조원으로 불었다. 본예산은 연평균 3%대 안팎만 늘릴 정도로 보수적으로 짜고 있지만, 추경을 자주 집행해 빚이 급속도로 늘었다. 2014년만 제외하고 최근 4년 중 3년에 걸쳐 모두 40조원의 추경을 집행했다. 국민 1인당 78만원꼴의 나랏돈을 추가로 뿌린 것이다. 올해 문 후보나 안 후보가 집권해 추경을 하면 5년 사이 4차례 추경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연례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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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DB


물론 성장률이 2%대에 머물고 내수는 가라앉아 있어 군불을 지필 방법을 짜내야 한다. 하지만 나랏돈을 푸는 것만 해결책이 될 수도 없고, 본예산 집행에 들어간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추경 얘기를 꺼낼 정도로 비상 상황도 아니다. 요즘 반도체 수출이 날개를 달았다. IMF, 주요 해외 투자은행(IB), 한국은행 등 국내외 기관들이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치를 속속 끌어올리는 중이다. 추경을 할 만한 법적인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 시절인 것이다.

국가재정법 89조는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가 발생하거나, 대량 실업이나 남북관계 변화 등 대내외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을 때' 등에 추경을 편성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세계경제가 상승세를 타는 요즘이 이런 요건에 해당하는 비상 시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부쩍 준법을 강조해온 문·안 두 후보가 국가재정법만 우습게 여겨선 안 될 것이다.

추경은 집권 세력이 자기네 주머니를 털어 집행하는 게 아니다. 세금을 되돌려주거나, 국채를 찍어 나랏빚을 늘리는 행위다. 대선 후보들이 집권도 하기 전에 추경을 공돈 쓰듯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취임 후 나라 살림을 어떻게 다룰지 벌써부터 걱정된다. 앞으로 5년 사이 한국 경제가 큰 고비를 겪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누가 이번 대선에서 당선되더라도 그때를 염두에 두고 취임 초기에 나라 곳간을 신중히 다루길 바란다.

[손진석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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