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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한번뿐인 인생, 탕진에 빠져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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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 커버스토리

인형뽑기 탕진재머 이재목씨…“바로 지금 자잘한 재미 느끼는 게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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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뽑기 고수 이재목씨가 인형 위에서 활짝 웃고 있다. 사진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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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인형뽑기방에서 결혼정보업체 듀오의 이재목(42) 팀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뽑기 기계를 훑어봤다. “여기가 좋겠네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천원짜리 지폐 하나를 꺼내 집어넣었다. ‘위잉~’ 3개의 손가락이 달린 집게가 움직였다. “인형의 다리와 엉덩이 사이에 집게를 내려야 합니다.” 그가 조이스틱(게임 컨트롤러)을 몇 번 툭툭 치자 집게가 정확히 인형의 샅으로 들어갔다. 집게가 올라가자 인형도 따라 올라왔다. 집게는 인형 배출구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설마 한번에 성공?

배출구 근처까지 오던 집게가 갑자기 힘이 풀렸는지 인형이 툭 떨어졌다. “아!” 하는 탄성이 나오는 찰나, 이씨는 바로 천원짜리 하나를 더 넣었다. 집게가 다시 움직였다. 배출구 근처에 떨어진 인형을 다시 집으려는 걸까? 앗, 그런데 집게가 딴 곳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는 집게를 표적으로 삼은 인형 뒤로 보낸 뒤 인형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집게는 집는 게 아니라, 밀어넣는 용도였다. “대부분 인형을 집으려고만 하니 실패합니다. 인형뽑기방에서 집게가 끝까지 힘을 유지할 확률은 매우 낮거든요. 배출구 근처에 인형을 쌓아놓고 집게로 쳐서 밀어넣는 겁니다.” 그렇게 그는 2000원으로 인형 하나를 뽑았다. 인형뽑기방에 있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몰려들었다.

그의 놀라운 기술을 눈으로 확인하자 경외감마저 생겼다. 10분 남짓 걸어 도착한 그의 집에서는 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아파트 문이 열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각양각색의 수백가지 피규어와 인형들. 인형은 100개가 넘고, 피규어도 비슷한 수라고 했다. 그나마 조카들에게 나눠줘서 이 정도다. 전부 뽑기로 뽑은 것이었다.

이씨가 뽑기의 고수가 된 것은 ‘탕진’ 경험 때문이다. 1년 전 우연히 공돈 7만원이 생겨 어떻게 쓸까 고민하는 순간 눈에 인형뽑기 기계가 들어왔다. 이씨는 30분도 안 돼 그 자리에서 돈을 전부 날렸다.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되더라고요. 뭔가 법칙이 있을 거 같아 유튜브 등을 뒤지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뽑기 기술 강의를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씨는 유튜브 채널과 각종 블로그 등을 뒤져 뽑기 기술을 익혔다. 그가 익힌 ‘비기’는 인형을 집는 게 아니라, 일단 배출구 근처에 쌓아놓은 뒤 밀어넣는 방식이다. 하루에 몇만원씩 투자하며 연습 또 연습을 했다. 그동안 100만원을 넘게 썼다.

고수가 된 그는 요즘 퇴근 뒤나 주말이 되면 서울 시내를 헤맨다. 잘 뽑히는 인형뽑기 기계를 찾기 위해서다. 뽑기 기계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잘 뽑히는 기계란, 배출구 근처에 인형이 이미 높게 쌓여 있는 것들이다. 앞서 뽑기를 했던 사람들이 실패했던 흔적이기도 하다. 이런 기계가 잘 뽑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하는 건 아니다. 하루에 2만원을 넘기지 않겠다는 원칙도 있다. “만원은 투자고, 만원은 회수라고 보면 됩니다. 투자 없이 얻어지는 건 없어요.” 만원은 인형이 잘 뽑히도록 토대를 만드는 데 쓰고, 만원은 진짜 뽑을 때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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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목씨가 인형뽑기방에서 인형을 뽑고 있다. 사진 이정국 기자


그가 이런 소소한 탕진을 즐기는 것은 별다른 취미가 없는 1인가구이기 때문이다. “제 나이에 많이 하는 골프도 안 하고 술도 잘 안 마셔요. 2만원 정도 쓰면 30분은 집중하면서 보낼 수 있거든요. 스트레스 해소도 됩니다.” 거기에 인형을 뽑았을 때의 성취감도 컸다. 뿌듯했다. 인형은 일종의 자신의 노력에 대한 축하 트로피다.

업주들과의 수싸움도 재미다. 최근 뽑기방 업주들은 수시로 쌓인 인형들을 흐트러뜨려 뽑기통을 평평하게 만든다. 인형도 예전과 다른 모양의 것을 갖다놓는다. 인형의 사지가 매우 짧아졌다. 집게로 집을 공간을 줄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약점을 찾아내 인형을 뽑았을 때 쾌감이 엄청나요.” 이씨의 말이다.

이씨처럼 매일매일 소비를 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탕진잼’(탕진+재미)이 젊은층에겐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드러그스토어 올리브영 자료를 보면 대표적 탕진 아이템인 네일 스티커, 립스틱, 매니큐어 등 1만원 미만 화장품은 최근 매출이 전년 대비 100% 이상 늘었다. 탕진잼 아이템 가운데 하나인 수첩 브랜드 몰스킨 관계자는 “매출이 최근 많이 늘고 있다. 탕진잼 열풍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탕진잼이 청년 실업, 경기 불황 등으로 집 장만, 결혼 등이 언감생심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나온 ‘탈출구’라는 사회학적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의미를 넘어 단순 ‘재미’를 위해 탕진을 하는 이들도 많다. 탕진을 즐기는 사람들이란 뜻의 ‘탕진재머’라는 말까지 나왔다.

“뽑기 등으로 탕진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거나 불쌍하게 볼 필욘 없어요. 이렇게 자잘한 재미를 느끼며 사는 게 나쁜 건가요. 지금 재밌는 게 가장 좋은 거지요.” 이씨는 인형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탕진재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다. 어차피 당신은 한번 사니까! 욜로!(You only live once!)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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