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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블랙리스트, 죄가 될까②] ‘기업 블랙리스트’ ‘노동계 블랙리스트’ 처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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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지원 배제ㆍ취업봉쇄 하면 강요죄 성립



[헤럴드경제=고도예 기자] 박근혜 정부가 좌파로 분류된 문화ㆍ예술인의 명단을 만들어 정부 지원에서 배제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존재가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노동계 취업 배제 명단’, 결은 다르지만 ‘갑질 고객 명단’까지 블랙리스트의 역사는 뿌리깊다. 블랙리스트 작성과 활용이 법적 처벌 대상이 되는 조건을 알아본다.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활용하도록 한 혐의를 받는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는 형법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적용됐다. 이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타인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 성립하는 범죄다. 명단을 만든 것만으로는 죄가 되지 않고, 이를 활용하고 일선을 압박해야만 죄가 된다는 의미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작성 때문이 아니라 명단에 오른 예술인을 지원에서 배제하도록 한국 문화예술위원회ㆍ영화진흥위원회ㆍ출판진흥원 소속 임직원을 압박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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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판에서 직권남용 혐의를 입증하는 건 만만찮다는 지적이 법조계 한 쪽에서 나온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상급자가 명령한 것을 전달만 해준 것이라면 본인의 직권을 남용한 것으로 봐야하는지 논쟁 여지가 있다”며 “충분히 유무죄를 다툴 수 있다”고 했다.

형사처벌이 아니더라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낼 수 있다. 1978년도 동일방직 노조투쟁 당시 해고된 노동자들은 지난 2010년 “중앙정보부 등이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재취업을 봉쇄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4년에 이르는 재판 끝에 파기환송심인 서울고법은 지난 2014년 9월 국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활용한 데 대해 원고인 노동자 2명에게 각 50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와 기업들, 경찰, 노동부가 조직적으로 노조활동을 한 노동자의 명단을 작성하고 배포해 노동운동을 통제해왔다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발표를 받아들였다. 이어 “국가 공무원들이 해고자 명단을 조직적으로 작성하고 관리해 재취업을 막고 차별의 수단으로 삼은 행위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 것일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서 유래한 인격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공무원이 아닌 민간 기업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인이나 하청업체를 계약에서 배제했다면 처벌대상이 될까. 법조계에서는 처벌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헌법상 계약의 자유가 존재한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최적의 계약을 하기 위해 정당한 업무 수행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민간 기업을 처벌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고 했다.

다만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언급하며 각종 지원에서 배제하겠다고 협박한 경우에는 강요죄가 성립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9단독 박재순 판사는 근로기준법위반과 강요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한 대기업 임원에게 지난 6일 벌금 1500만원을 선고했다. 이 임원은 지난 20014년부터 2015년까지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상습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운전기사를 상대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다른 기업체에 유포해 운전기사 취업을 방해할 것처럼 말하며 검찰과 노동청에서 진술을 번복해달라고 요구한 혐의도 받았다.

기업이나 개인이 특정 근로자를 고용하지 못하게 할 의도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유포한다면 근로기준법에도 저촉될 수 있다. 근로기준법(40조)에서는 근로자의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비밀 기호 또는 명부를 작성·사용하거나 통신한 경우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일례로 서울중앙지법은 근로기준법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영어학원 원장 정모 씨에게 지난 2011년 벌금 1000만 원을 내렸다. 정 씨는 자신의 학원에서 일하던 강사들이 퇴직하자 불만을 품고 한국학원 총 연합회에 이들의 인적사항이 담긴 이메일을 보냈다. 정 씨가 보낸 메일에는 “무례하고 비인격적인 교사들로 민ㆍ형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며 “블랙리스트로 활용하시길 바란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이메일을 받은 한국학원총연합회 측은 이들 강사들의 명단을 회원 학원 200여 곳에 전송한 것으로 조사됐다.

yea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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